도솔이와 자주 산책 다니는 천호역 10번 출구 근방의 몽촌토성과 인근에 풍납전통시장은 토성과 바람과 새 그리고 유동하는 시장 사람들이 평화롭게 한데 어우러지는 고즈넉한 공간이다.
시월의 이른 저녁.
그러데이션으로 붉게 채색되는 가을 하늘을 배경 삼아 노년의 백발 신사분들이 벤치에서 장기판을 벌이고, 이따금 한껏 멋을 부려 차려입은 젊은 연인들이 깍지 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시장 한복판을 가로지른다. 종종걸음의 비둘기들보다 더 바삐 움직이는 오토바이 배달원들이 위태롭게 오가는 좁은 길목을 허리 굽은 할머니가 느리게 횡단할 때, 푸른 토성 위로 까치 때는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목청껏 호명하며 빠르게 비상한다.
서울 안에 몇 안 남은 이토록 향토적인 공간을 나와 도솔이는 사랑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몽촌토성은 언제나 두 팔 벌려 도시의 서민들과 그들의 반려동물을 비롯하여 한반도의 이름 모를 텃새와 길냥이들을 안아주었다.
대략 1만보의 여정은 전적으로 도솔이가 모든 경로와 향방을 결정한다. 도솔이의 살가운 총총걸음을 뒤따를 때면 나는 내 몸의 지각세포들이 새롭게 깨어남을 느낀다.
도솔이의 경로 탐색은 진취적이다.
도솔이는 언제나 거침없이 새로운 노선을 개척한다.
도솔이는 유능한 항해사다.
도솔이가 나를 이끌고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 마냥 전투보행속도로 씩씩하게 전진하다가 불현듯 멈춘다.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전진한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개들은 늑대 무리 사회에서 진화해 온 유전형질을 토대로 뿌리 깊은 공동체성을 간직하고 있다.그들은 도태된 동료가 없는지 살피며 이동한다. 동료와 협력하면서 추적형 사냥을 해온 습성이 늑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도솔이가 전진 보행 중에 이따금 고개를 돌려 나의 뒤따름을 확인하는 것은 도솔이가 나를 동료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솔이를 뒤따를 때 나는 포유동물의 먼 친연관계로서, 그들의 무리 질서에 참여하고 있음을 느낀다. 무리 사회 안에서 시시각각 변주되는 평등성과 위계질서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발현되는 관계성의 신비이다.
도솔이가 자기 마음속으로 설계하고 있을 그 어떤 무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반갑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도솔이와 친구로 다시 만나 대화하고 싶다.
우린 오래된 동료였으니까.
참된 친구는 나머지 세상이 떠날 때 함께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월터 윈첼. 미국 언론인
늑대 무리
산책의 첫걸음부터 줄곧 전투 보행속도로 약진하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기 바쁜 도솔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시시각각 새롭게 펼쳐지는 낯선 후각적 이미지들에 환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도솔이는 코가 눈이니까.
도솔이의 내면세계에 싱그럽게 다가서고 있을 각종 냄새와 향기들이 머금고 있을 그 신선함을 떠올리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새로운 체취와 낯선 향기의 발견을 잇대어 가면서 도솔이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의 질감을 관념이 아닌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경험되지 않았던 새로운 체취를 언제나 도솔이는 찾아 나서고, 설레는 미지의 향기 안에서 갯과 동물로서의 자기 삶을 늘 쇄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도솔이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영롱한 눈빛을 결코 잃지 않는다.
늘 함께 걷는 산책로에서도 매번 다른 향취를 찾아내고는 신명이 난 도솔이를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같은 공간에서도 늘 새로워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방금 벤치 아래에서 새로운 체취를 발견한 도솔이가 킁킁대는 탐색의 집중도를 최고조로 높이고 있다. 신나는 마음이 고양되는가 보다.비록 ‘개목줄’을 걸고 있지만 도솔이는 전진 보행할 때 자기만의 출렁이는 고유한 리듬감을 뽐내며 개별적 존재로서 언제나 위풍당당하다. 사뿐사뿐 율동하는 듯한 도솔이의 가벼운 총총걸음은 인간들의 지리멸렬한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살아있는 것들의 ‘태초의 걸음’을 시원으로부터 불러와 형상화한다.
도솔이의 탐색 속도가 약진을 넘어 돌격의 템포로 전환되었다.
도솔이가 달린다.
나는 따른다.
도솔이가 달릴 때면 내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지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만은 천천히 움직인다.
도솔이와 산책할 때면 나는 시간이 둥글게 느껴지고, 신생하는 현재의 시간들에 감사하게 된다.
도솔이가 느끼는 시간의 질감이 어떤 종류의 것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도솔이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나의 살냄새와 나의 목소리를 자기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그 무엇으로 단단하게 구성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도솔이가 이해하는 시간의 개별성으로서 도솔이가 감각하는 세계 안에서 명징할 것이기에 나로선 감동적이고 그저 고마울 뿐이다.
도솔이와 내가 각각직면하고 있는 개별적 시간의 질감은 우리의 관계성으로부터 창발 되기에,나에게 도솔이는 '가슴으로 낳은 내 아들'이 맞겠고 도솔이에게 나는 '동료'가 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