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카르도 Aug 08. 2024

그저 개밥을 챙겨주었을 뿐

1KG의 블랙홀

이를 어쩌지.

거실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도솔이가 헛구역질을 하고 노랑빛깔 점액을 토하더니, 하이톤으로 쉬질 않고 낑낑대며 나를 부른다. 견종을 불문하고 개를 좋아하는 여사친에게 도솔이를 보여준다고 차에 태워 시내를 좀 돌았더니 멀미가 난 모양이다. (정말 미안하다 도솔아)      


이제 5개월령인 도솔이가 내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네발로 엉금엉금 나를 향해 기어 왔다.

~ 미치도록 사랑스럽구나. 

페키니즈 자견들은 심장폭격기라는 말을 매일 실감하고 있는 와중이.

이 꼬물꼬물한 생명체는 어쩌자고 이토록 작고 소중한가.

한 줌도 안 되는 저 몸뚱이 안에도 척추동물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가 있을 텐데, 조물주가 만드신 소우주라는 것이 정말 따로 없구나.     

솜뭉치 같은 도솔이를 조심스레 품 안으로 안아 올렸다  

토사물로 흥건해진 주둥이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대니 분홍 빛깔 혓바닥으로 간질간질 핥는다. 핥다가 성에 안 찼는지 유치가 조금 보이는 앙증맞은 잇몸으로 오물오물 깨문다. 치 갈이를 할 시기라 잇몸이 간지러운 모양이다.

5개월령 도솔이


내 손가락을 어미젖인 양 빨고 깨무는 도솔이가 못내 사랑스러워 나는 분홍 빛깔 끈끈한 뱃가죽살에 내 볼을 가져다 비비고 곰실대는 네 발바닥에 뽀뽀 세례를 주었다. 흡사 대추알 같이 생긴 작은 생식기까지도 볼록한 배꼽과 더불어 한 쌍으로 귀여웠고, 윤이 나는 젤리 같은 주둥이를 타고 흐르는 침과 콧물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턱밑 살의 꼬순내, 그리고 모피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젖비린내조차도 향기로웠다.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뜻밖에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만 왈칵 쏟아졌다. 낯설게 터져 나온 울음은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뒷목을 타고 뜨겁게 올라왔다. 남자도 갱년기가 온다는데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스스로 멋쩍어 얼른 각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아내고 도솔이를 품에 꼬옥 안고 맹세했다.

사랑해 도솔아 좋은 아빠가 될게

 

울고 나니 후련하고 개운했다.

가슴과 머리가 맑아졌다.

고즈넉한 시간 속에서 뜻밖에도 공허감이 아닌 충만감이 느껴졌다. 

미지의 평온함이 찾아온 그날의 오후는 오랜 지병이던 경계성인격장애를 앓고 난 후로 처음 느껴보는 안락함이고 평화로움이었다.

(경계성인격장애는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동반하는 복합적인 정신질환이다)     





어느덧 밥때가 되었다.

사료 20알을 세어 안전한 유아용 식기에 넣고 따뜻한 온수를 부어 자작하게 담근다. 이제 촉촉하게 불기를 기다린다. 석 달 전에 집에 갓 데리고 왔을 땐 도솔이보다 내가 더 유난을 떨며 강아지 이유식부터 조리해 주겠다고 난리를 쳤었다. 그런데 동네 수의사가 난이도 높은 이유식보다 불린 사료로 시작하는 게 강아지에게나 초보 견주에게나 유익하다고 하여 그 말을 듣기로 했다.      


도솔이는 기특하게도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불린 사료도 잘 먹었다. 잘 먹어줄지 조마조마했던 첫 급여 때에도 도솔이는 불린 사료가 담긴 접시로 킁킁거리며 다가가 자신이 먹어 마땅할 음식인지를 본능적으로 탐색했고 이내 곧 흡입하듯 쩝쩝대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부모 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1분 만에 흡입하듯 도솔이가 사료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자마자 옆으로 돌더니 바로 쉬야를 한다.

보통 쉬야를 할 땐 패드를 찾아가 5~7회를 시계방향으로 빙빙 도는데 이번엔 급했는지 밥 먹은 그 자리에서 한번 돌더니 바로 자세를 잡았다. 패드에 소변을 가리는 것은 아직까진 반반이다. 배변감에 여유가 있으면 패드까지 이동하고 급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쉬야를 하는 편이다.      

양이 많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이불을 적시었다.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마른 수건으로 대충 닦고 축축한 부분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정신 나간 소리 같겠지만 도솔이 오줌 냄새가 마치 베이비파우더 향처럼 느껴졌다. 

위생 문제라면 결벽증 수준으로 청결을 고수하던 나인데, 웬걸 도솔이 똥오줌은 전혀 더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도솔이가 배변할 때마다 잘 싸는 것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도솔이 엉덩이와 젖은 복부를 티슈로 닦고 뒤처리하는 게 나에겐 보람이고 큰 기쁨이었다.

그렇게 도솔이는 하릴없이 소모되던 내 삶의 낡은 질감들을 단박에 부수고 나의 일상 안으로 돌진해 왔다.           




잘 먹고 잘 쌌으니 이제 깨방정으로 온 집안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시간이다.

도솔이는 경이로운 호기심으로 빨래 바구니며 신발이며 자기 밥그릇, 패드, 쿠션, 수건, 두루마리 화장지, 택배박스 할 것 없이 모조리 입으로 가져가 물고 뜯었다. 좁쌀 만한 크기의 앙증맞은 유치로 도솔이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잘근잘근 씹어보고, 물어보고, 빨아보고, 핥아보고 또 냄새 맡았다.     

도솔이의 경이로운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예닐곱 살 아동기 때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온종일 동네 골목을 뛰어다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도솔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으로 이 세상을 모조리 탐구해 보겠다는 탐험가적 열정으로 도솔이는 살아 숨 쉬는 환희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는 조금만 방심해도 고가의 이어폰이 작살나는 것은 찰나였고, 골판지 박스를 뜯어먹다 목에 걸려 켁켁대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는 한시도 도솔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었다. 도솔이가 놀다 지쳐 잠들 때까지 나는 도솔이를 지켜보고 케어해 주는 것 외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1킬로그램. 솜뭉치만 한 질량의 존재감으로 도솔이는 그렇게 블랙홀처럼 내 삶의 시공간을 빨아들였다.      




도솔이 꽁무니만 쫓기 바빴던 하루가 지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밤이 되었다.  

도솔이가 어느새 배를 까뒤집고 내 이불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세상 편한 자세로 잠이 들었다.

자는 모습도 천사 같다. 

도솔이가 깰까 봐 이불 가운데 자리에 그대로 두고, 나도  조심스럽게 도솔이 옆에 새우 자세로 누웠다.

내 겨드랑이와 가슴팍에 도솔이의 보드라운 모피가 닿을랑 말랑할 정도로 가까이 밀착했다.

도솔이가 분홍빛 혀를 빼꼼 내밀고 쌔근쌔근 숨을 쉰다. 도솔이 호흡에서 젖비린내가 은은하게 퍼졌다.

사랑하는 이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행복한가.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It is only with the heart that one can see rightly,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
사람은 오로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5개월령 도솔이



5개월령의 깨발랄한 도솔이에게 24시간 온종일 강도 높은 집중을 쏟아야만 하는 나의 일상은 행복하면서도 사실 좀 버거웠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

도솔이가 옭아맨 나의 하루하루는 불편한 듯 보였지만 실로 엄청난 축복이었다.


생각해 보라.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허에 쩌들어 방황하고 종일토록 우울감에 시달리다 밤만 되면 죽네사네 하며 술을 퍼마셨다. 염세적인 생각들이 농축되면 버릇처럼 반기별로 자해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아니 애당초 그럴 수가 없다.

도솔이를 24시간 안전하게 돌보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삶의 의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솔이를 돌보는 활동 이외는 종일토록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은 뒤집어보면 종일토록 '술 먹고 자학할 틈을 낼 수가 없음'을 뜻했다.

칼춤을 추던 지난밤들이 사라지고 도솔이와 함께 유쾌하게 지친 몸으로 코 골며 잠드는 평화로운 밤들이 지속됐다.         



도솔이는 나의 첫 번째 반려견이었고, 그래서 강아지 육아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도솔이 입양을 계획하면서 사실 나는 내가 아빠 노릇을 온전히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었다. 게다가 술 먹고 이따금 자해하며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날들이 있었기에 도솔이에게 위험한 아빠가 되진 않을지 솔직히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살아 숨 쉬는 도솔이를 만난 첫날부터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솔이를 건강한 성견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다짐과 함께 반드시 그렇게 해낼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도 갖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보람되고 가치 있는 하루하루를 도솔이와 함께 만들어 나갔다.


오직 우리 도솔이를 잘 먹이고 잘 싸고 잘 자게 하고픈 유쾌한 조바심 덕분에, 신기하게도 비실대던 내 몸 안에 생기가 충만해졌다.

잿빛이던 내 삶은 도솔이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점점 밝아졌다.

치유의 시간은 그렇게 멍멍멍개 짖는 소리와 함께 시나브로 전개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황제가 사랑한 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