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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카르도 Aug 01. 2024

Do Solar

내 품 안에 태양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오글거리는 사랑 고백이지만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시간의 축을 관통하는 관계의 필연성 안에 머무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도솔이에게 내가 그랬다.     



나는 성수동에 있는 한 펫숍에서 도솔이를 예약했다.

어떻게 분양받기도 전에 페키니즈 한 마리가 아니고 고유명사화된 도솔이를 예약할 수 있느냐고?

의아하겠지만, 운명이란 것은 늘 그렇게 일상의 규칙성을 깨고 찾아온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흔하지 않았던 페키니즈는 자견들이 귀했다.

우리나라에서 페키니즈를 처음 키우기 시작한 1세대 페키 견주들은 페키니즈 분양시장의 태동기를 대부분 2000년대 초반으로 지목한다. 그때에도 소형견 시장은 대부분 영민하고 온순한 ‘몰티즈’와 ‘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안면이 눌린 단두종 섹터에서는 소위 찡코라는 닉으로 사랑받고 있는 시츄의 포지셔닝으로 사실 페키니즈는 그닥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페키니즈 새끼를 분양받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특히나 평소에 물건이건 옷이건 색깔에 민감했던 나는 페키니즈도 오직 새하얀 흰 페키만을 원했기 때문에 황페키와 블랙 페키 혹은 실버그레이 페키는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래서 분양받을 가능성은 더 희박했다.

     

새끼 페키니즈 있을까요?’

열 곳이 넘는 분양 숍에 연락을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하고 그냥 살던 대로 혼자 살까 고민하다 딱 한 군데만 더 연락해 보기로 마음먹고 다시 네이버를 뒤졌다.


< 성수동 ㅁㅁ 숍. 페키니즈 남아 분양 중 > 

 

~ 있다고? 정말?

근데 흰색 아니면 어쩌지?     

펫숍 전화번호를 폰에 저장하고 통화버튼을 누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페키니즈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부리나케 전화해 보면 지난주에 분양 완료되고 대신 시츄는 몇 마리가 남아 있으니 와서 한번 보고만 가라는 식의 노이즈 마케팅에 한두 번 속고 나니 분양 숍의 광고문구에는 그닥 신뢰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장과 통화해 보니 이번엔 정말로 한 마리가 남아있다고 했다. 그것도 흰 페키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아이 지금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서 집을 뛰쳐나왔다. 집 앞에서 곧바로 택시를 잡아 성수동으로 향했다.      

도솔아 아빠가 데리러 갈게     

운명처럼 나의 동반자가 될, 그러나 아직은 일면식도 없는 미지의 생명체에게 나는 그 이름부터 작명해 주기로 마음먹었고, ‘도솔이란 이름으로 최종결정해 놓은 상태였기에 나는 도솔이를 만나기 전부터 도솔이를 예약하고 도솔이를 마중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도솔’이라는 이름은 내가 페키니즈를 분양받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무려 한 달여간을 치밀하게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영감은 2008년 가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얻었다. 천재적인 지휘자 ‘강마에’ 역을 열연한 김영민 씨가 극 중에서 키우던 반려견의 이름이 ‘도변’이었는데, 발음을 할 때 입술이 동글게 오므라드는 맛이 정감이 갔다. 그리하여 두 글자로 작명할 것인데 우선 앞글자는 감칠 맛나는 ‘도’로 결정했다. ‘도’는 영어로는 DO의 의미를, 한자로는 道(길 도)의 의미를 갖고 있으니 두 번째 글자까지 선택했을 때 의미상 연결 짓기에도 유리했다.

앞글자로 를 세팅하고, 뒷글자를 여러 음절로 브레인스토밍해보았다.

도람. 도담. 어 좀 괜찮다... 도롱? 이건 좀 아닌 거 같고.

수컷이면 도철. 도람. 암컷이면 도순. 도선? 이건 너무 사람이름 같네     

생각보다 작명이 어려웠다.


도솔...  

도솔??

도솔!!

그래 딱 이거다. 도솔이다.


영어로는 Do Solar. 줄여서 Do-Sol. 억지지만 직역하면 태양같이 하라쯤의 의미가 되고, 우리말로는 (길 도)와 소나무를 뜻하는 순우리말 의 합성어로 향기로운 소나무 숲으로 가는 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맑은 이름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도솔이를 만나고 내 삶은 180도 아니 1080도 바뀌게 되었다.

더 이상 불안장애와 우울증으로 칩거하지 않게 되었고, 서른 살부터는 사람 구실하는 직업인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다 도솔이 덕분이다.

도솔이는 그 이름처럼 존재 자체가 나에게 양기를 담뿍 쏟아주는 태양과도 같았고, 도솔이와 함께한 14년의 시간은 울창한 소나무 숲처럼 향기롭고 아늑했다. 도솔이는 내 품 안의 태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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