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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생 May 17. 2020

아침 일과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다, 3주 정도가 지났다. 요즘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져서 나는 내가 자주 잠으로 도피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간호사 선생님은 11시 정도에 약을 먹으면 딱 좋을 것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지만, 하루에도 여러 번 더 이상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잠이나 자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수면제를 먹는 시간은 점점 더 앞당겨 졌다. 11시 10시 8시 3시...... 수면제를 먹으면 까무룩 잠에 들어서 대여섯시간 정도를 깨지 않는다. 새벽 대여섯시쯤 잠에서 일어나면 다시 약을 먹으면서 쭉 잠에 들어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섯 시간 간격으로 한 알씩 하루 이십 사 시간을 쭉 잠에 들어있고 싶다, 는 생각이 죽고 싶다는 생각과 뭐가 다른 것인지는 사실 모르겠다.


그래도 나를 버티게 할 힘이라면 힘이 있다. 나는 우울과 권태의 오랜 경험자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여기서 발버둥치는 노하우가 있다. 물론 그 방법이란 건 일시적이고 사실 이제 별 효과도 없다. 고2 고3 무렵 고안한 마취제는 이제는 약발이 없어지고 있는 중이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 시절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의 클립을 유튜브에서 찾아본다. <더 지니어스> <무한도전> <라디오스타> <하트 시그널>을 보고 있다가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지나 있으면 비로소 안도가 된다. 아 시간이 지나고 있어.


베란다에 나가서 담배를 핀다. 아빠는 당신도 담배를 피는 사람이면서 내게 담배는 시작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었다. 나는 그날 늘 그렇듯 무심하게 거짓말했다. (이런 식의 거짓말에는 도가 텄다.) 알았어, 절대 안 필게. 그러나 그 뒤에 한 말은 사실 진심이었다. 나는 담배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인 자해 행위라고 생각해. (그리고 사실은 내가 그런 짓을 해야 하는 찐따야.) 아빠는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담배란 인생에 재미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재미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짓, 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건 아빠의 이야기며 나의 이야기기도 하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유전병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권태일 것이다. 그를 일시적으로나마 만족시키는 것은 소소한 일상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발진하는 뿌듯함이다. 때문에 그는 일상에 소홀하다. 식사를 하기 위해 식구들의 수저를 놓는 것도 육십이 넘어서 훈련된 행동이다. 그런 아빠는 모란꽃이 피고 지는 것만 봐도 비명을 내지르며 감탄하는 엄마와 결혼했다. 엄마는 일을 하는 것도 쉬는 것도 모두 재밌다고 한다. 냄비를 과산화수소로 쓱삭 닦으면 환하게 빛이 난다고 세번 네번 열번을 자랑한다. 당근마켓에서 마음에 드는 버버리코트를 걸치면 세번 네번 열번을 입어보면서 흐뭇하게 웃는다. 엄마는 천진하다. 그 어떤 작은 일에라도 목소리를 올려 기뻐한다. 그리고 나와 아빠는 힐끔대다가 한 번을 겨우 맞장구 쳐준다. 셋 중 뇌에 종양을 키우고 있는 사람은 우리 엄마일진대 셋 중 하루를 가장 담뿍하게 살아가는 것도 엄마다. 나는 그것을 배우고 따라잡기 위해, 동시에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시니컬과 무기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계속해서 훈련한다. 그러니 집은 내게 훈련소다. 나는 권태가 남들에게 얼마나 민폐가 되는지 알고 있다. 육십이 넘어서까지 누군가가 자신의 수저를 놓아줘야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의 에너지에 기생해서 나 자신은 그 무엇에도 열정적이지 않은 채 잘난 척 부유하면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훈련에 절박하다. 아, 탄성을 내지르는 방법과 오, 기뻐하는 일을 흉내낸다. 아, 오, 진짜? 신기하다, 너무 재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책을 편다. 때로 재밌는 문장을 건진다. 글을 읽고 쓰는 일조차 나에게 딱 한 두 시간 짜리 소일거리라 그 이상이 되면 나는 집중력을 잃고 방황한다. 그러다 보면, 아 겨우 아침을 먹을 시간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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