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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리 Feb 14. 2022

그럴 땐 적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울할 때 일단 쓰는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


  우선, 나는 쓰는 게 좋아서 일종의 대형 사고를 쳐버린 사람임을 먼저 고백한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들 다 하는 대입을 남들 다 하는 대로 하다 보니 얼떨결에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있었다. 나와 가장 맞지 않는 학과가 있다면 그건 기계공학과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적응을 못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1년을 다니고, 휴학을 하고, 다시 1년을 더 버텨본 후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역시 전공을 바꾸자. 그리고 이왕 바꾸는 거,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걸로. 그래서 나는 기계공학과에서 국어국문학과로 전과를 한, 특이하다면 특이한 사람이 됐다.


  이유를 묻는 사람도 많았고, 왜 그랬냐며 타박하는 이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부모님은 전과를 한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신선한 질문을 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아주 많은 용기를 끌어모아야 하는 힘든 결정이었지만 아직까지 후회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타고나길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이라 다들 겪는 일반적인 것들을 거센 풍파처럼 겪으며 지내왔고, 그런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읽고 쓰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지금도 읽거나 쓰고 있을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모두 대신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계속해서 쓰는 이유에 대해서, 나를 '쓰는 사람'으로 정체화할 때 느껴지는 안정감에 대해서는 여러분께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취하고 있던 자세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자세에서 꼼짝도 못 할 만큼 지독하게 우울한 날이 꼭 있다. 우리 모두에게 같은 빈도로 찾아오는 날은 아닐지라도. 그럴 땐 높은 확률로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음악? 들을 게 없다. 넷플릭스? 스크롤만 내리다 끌 게 뻔하다. 인스타그램? 해로우면 해로웠지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그 외에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게 무엇이 됐든 그걸 실행할 의지가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우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일단 온몸 구석구석에 티끌만큼 남아있는 힘이라도 끌어모아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른다. 혹은 빈 노트와 연필을 끌어당긴다. 쓸모 있는 글이 될지 의미 없는 낙서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나는 쓰기 시작한다.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을 테니 아주 회의적이고 신랄한 제목을 붙이는 걸로 시작해볼 수도 있겠다. (살짝 고백하자면 나는 얼마 전에 '이 죽일 놈의 인정 욕구'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머릿속에 있는 알 수 없는 이 시커멓고 우울한 놈들을 당장 음지로부터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목표다. 안개처럼 절대 잡히지 않을 듯 보이는 그것들을 포획해다가 화면(혹은 빈 노트)에 쏟아낸다. 그 과정, 그러니까 지긋지긋한 두통을 야기하는 온갖 복잡한 감정들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그 놈들에게 실체가 있다는 걸 발견하게끔 돕는다. 그 실체가 인정 욕구가 됐든, 몸무게에 대한 강박이 됐든, 나만 실패자라는 생각이 됐든. 그렇게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면 설령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더라도 은근하지만 분명한 안도감이 조용히 찾아온다. 그 작은 안정감을 발판 삼아 이제는 내 머릿속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오늘은 비가 왔고, 원래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하지만 마침 우울하던 참이라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전원 버튼을 눌렀고, 이렇게 다섯 문단 째 글을 쓰고 있고, 내가 형체 없는 것에 휘둘려 우울해했음을 알아차리고 어느 정도 안도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다른 날은 다 제쳐두고 이런 울적한 날에만 글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느끼는 강렬한 감정들, 그러니까 기쁨과 환희, 불안과 갈등, 고민과 초조함,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 순간들을 문장으로 만들기를 독려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불안정한 날의 기록들이, 조금 더 어린 날 과거의 당신 그 자체였을 어떤 글들이 지금의 당신에게 진심 어린 위로나 추억을 안겨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에는 한번 적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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