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사색
목요일도 무사히 저물어 갑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느새 업무 시간은 약 1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조금씩 부산스러워지는 게 느껴지네요. 텀블러도 씻고, 화장실도 한 번 갔다가 신발도 괜히 미리 갈아 신는 잔잔한 어수선함에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구나, 싶은 새삼스러운 느낌도 받습니다.
어제는 S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저는 제가 아끼는 사람과 둘이서 가는 나들이라면 뭐든지 데이트라고 부르는 걸 좋아합니다. 편안하고 다정한 S와, 꼭 그 아이만큼 예쁜 하늘을 보며 목적지도 없이 걸어 다녔지요. 보광동은 처음 가보는 거였는데 참 좋더라고요. 어떤 것들은 낯설어서 또 다른 것들은 익숙해서 좋은 곳이었습니다.
앗, 갑자기 제 자리로 전화가 왔습니다. 벨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짐짓 안 놀란 척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지만 사실은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신입인 저로서는 아직 두려운 일이거든요. 옆자리에 앉아 계신 과장님께서 벨소리 크기를 줄이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 회사 선배들은 참 다정한 편이셔요. 그래서 저는 제가 운이 참 좋다고 생각하지만, 벌서 8년째 살고 있어 정이 한참 들어버린 마포구를 떠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참 아쉽습니다.
제가 서울을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인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떠나려고 결심하니 이렇게까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줄은 몰랐던 거죠. 연고도 없는 곳으로 정말 이사를 올 수 있겠느냐는 말에도 딱히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난 주말은 하필 날이 참 좋아 버려서 이태원 어느 카페 야외석에 앉아 하릴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참 마음 아프게도 아름답더라고요.
얼마 전에 산 에세이집 속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커서, 그 아름다움을 담으려면 매번 가까스로 헐떡이며 그 뒤를 쫓아갈 뿐이라고요. 아름다운 것들을 담으려면 우리는 늘 어느 정도는 처절해야 하나 봅니다. 아름다워서 처절해지고, 처절해서 아름다워지는, 막연한 꼬리 잡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도록 태어났을지도요.
버스를 타는 걸 싫어했었는데 이제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 것들이 꽤 많아진다고 느낍니다. 싫어하다가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다가 싫어하게 되는 것들요.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임을 호오를 통해 보여주려는 노력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꾸밈이 효과가 있을수록 남들 눈에 더 멋져 보일 만한 것들을 좋아하도록 종용하느라 마음 한 구석이 늘 피로했던 것 같아요. 힘이 빠져서 좋을 때도 꽤 많다고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다만 변화하는 나를 기록하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 같아요. 중요하다거나 꼭 해야 한다는 말은 다소간 폭력적으로 느껴져 하고 싶지 않고요. 그리고 기록이라는 건 종종 지겨워지잖아요. 다만 앞서 말했듯 흥미로운 일인 건 분명합니다. 그것도 미래의 나 자신에게요. 자칫 무용해질 것을 잘 알면서도 기꺼이 하는 일들은 어딘가 비장합니다. 하지만 그게 나를 위한 기꺼움이라면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겨도 좋을 듯합니다.
흥미롭고 기특한 일을 더 자주 하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럼에도 일상 속 영롱한 삶의 조각들을 가만히 모아본 하루에 기뻐하면서, 저는 집에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