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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Sep 16. 2020

열려있는 연습

[북스테이] 정원책방, 제주도 /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제주도를 여행하는 동안 서핑에 도전했다. 사실 첫 시도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바다와 서퍼에 대한 환상이 있어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전해보았다.


스무 살 여름 태국 푸켓에서 혼자 해변을 거닐다 막 바다에서 나오는 현지인 남자를 붙잡은 게 처음이었다. 나도 너처럼 파도를 타고 싶다고, 근처에 가르쳐주는 곳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서핑으로 그리 유명한 비치가 아니었기에 근처에는 강습소가 없었다. 실망한 나에게 그는 자신의 보드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시간당 얼마를 내면 어떻게 타는지도 가르쳐 주겠다고. 그의 가르침은 당연히 체계적이지 않았고 나는 물만 실컷 먹었다.


다음은 호주였다. "서퍼스 파라다이스(Surfers Paradise)"라는 비치가 있을 정도로 서핑으로 유명한 골드코스트에 왔으니 당연히 체험 프로그램에 등록을 했다. 이번엔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몇 번 고꾸라지고는 온 몸에 진이 빠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서핑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지내기를 몇 년... 그러다 작년에 다시 서핑 맛을 조금 보고는 빠져들게 되었다. 강릉의 한 게스트하우스가 개최한 명상, 요가, 서핑을 결합한 리트릿 여행에 간 것이다. 내가 호기심을 갖거나 좋아하는 활동 세 가지를 모아놓았지만, 그만큼 한정된 시간에 그 세 가지를 다 해야 해서 서핑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할애되지 않았다. 그래도 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2020년 여름! 코로나19로 여름휴가는 국내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휴가의 진정한 의미는 익숙한 일상에서의 탈출이 아닌가. 부모님과 함께하는 3박 앞뒤로 1박씩을 더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하면 좋을까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서핑이었다. 그러나 곧 망설였다. 부모님이 오시기까지 적당한 카페에 들어가 책을 읽으면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할 텐데... 서핑을 하자면 차도 없이 무거운 짐을 끌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해변의 강습소에 찾아가야 하고, 물기 젖어 뻑뻑한 바디 슈트를 당겨 입어야 하고, 무거운 보드를 이고 물에 왔다 갔다 해야 하고, 나와서 열악한 샤워시설을 이용해 겨우 씻고 다시 화장하고 긴 머리를 말려야 했다. 생각만으로 지쳤다.


내가 어릴 때부터 바다와 서퍼라는 이미지에 열광했던 이유는 그것이 나와 정반대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륙 도시에서 자란 데다 부모님은 바다보다는 무조건 산, 계곡 파라 바닷물에 들어간 기억이 별로 없다. 햇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모자와 양산을 씌웠고 그게 갑갑했던 나는 아예 바깥에 나가지 않는 편을 택했다. 책을 좋아하는 내향적인 성격이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차분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알고 몸을 쓰는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사람들 앞에서 특정 동작을 해 보여야 하는 체육 시간이나 장기자랑 시간이 되면 스스로가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바다는 낯선 모험의 냄새를 풍겼고, 자의식으로 가득했던 나에 반해 구릿빛 몸을 드러내고 파도를 느끼는 서퍼는 자유 그 자체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러, 이번엔 즐기기보다 내 두려움과 한계를 극복해보자는 지극히 동북아시아 모범생 다운 마음으로 서핑 체험을 신청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씨라 지상 훈련을 할 때부터 너무 힘들어 신청한 게 후회가 되었다. 물에 들어가자마자 강사님이 수영 못하는 사람? 하고 물어와서 (여기서도 내 주장을 100프로 하지 못하고) "거의" 못한다며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하지만 같은 조의 다른 사람이 "저는 진짜 하나도 못해요!!!" 하며 소리를 질렀다. 강사님은 그 사람을 중점으로 관리하겠다며 보드를 잡아주러 가버렸다.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첫 번째, 두 번째 시도...


늘 일어날 타이밍을 놓치고 보드와 함께 뒤집히던 예전과 달리 일어설 수 있었다. 얼떨떨해하는 나를 격려해주기 위해서인지 강사님과 같은 조원들이 타고났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 덕에 일어서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힘든 줄도 모르고 정말 신나게 파도를 즐겼다.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뒤처리도 그렇게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금기를 대충 씻어내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부모님이 벌써 근처라고 해서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한 채 강습소 밖으로 나와 기다렸다. 머리는 햇볕에 금방 말랐고, 바람에 기분 좋게 휘날렸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에도 서핑을 시도하는 한 인물이 나온다. 『시선으로부터,』는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주도에서 읽기 좋겠다고 생각해 챙긴 책이었다. 제목의 시선은 視線과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동시에 뜻한다. 여성 예술가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그녀의 가족들이 하와이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내용이다. 무슨 하와이까지 가서 제사냐고 묻는다면, 심시선은 원래 제사에 반대했던 인물로 그녀의 자손들도 그 뜻을 이어받아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10주기는 특별하게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시선이 젊은 시절을 보낸 하와이로 함께 가 전을 부치는 대신, 각자 여행하는 동안 기뻤던 순간을 가지고 오기로 한다. 그리고 손녀 우윤은 완벽하게 파도를 타고 그 거품을 제사상에 올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우윤은 어릴 때 크게 앓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부모님도 그녀가 행여나 잘못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고 자신도 삶을 소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촌동생이 하루 만에 성공하고 싫증을 내는 서핑은 그녀에게 따라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놀이나 스포츠가 아니다. 살아있음을 증명할 무언가가 된다.


서핑을 성공하고 난 뒤의 기쁨은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단순히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까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해놓았던 것이 깨어지는 해방감이었다. 앞으로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는 용기였다.


하지만 사람은 관성의 동물인지라 부모님과 3박 4일을 지내는 동안 그 편안함에 젖어들었다. 부모님을 먼저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시간이 오자 두렵고 귀찮아졌다.



내가 예약해둔 북스테이 공간에 태워주면서 부모님은 계속 여기가 맞냐고 물었다. 부모님 차만 믿고 외진 곳을 예약했더니 정말 아무것도 없는 숲길을 한참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북스테이와 같이 운영한다는 북카페는 코로나19로 외부 손님을 받지 않고 있었고, 스태프는 외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숙소 손님은 카페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해도 된다고 했다. 큰 창으로 바깥의 수령 높은 나무가 시원하게 보였고 층고 높은 천장까지 책이 한가득이었다. 테이블은 각기 다른 콘셉트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비행기 시간이 임박한 부모님이 떠나고, 나는 하릴없이 『시선으로부터,』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심시선이 여기저기 남긴 글과 인터뷰, 그리고 자손들이 그녀와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를 기쁘게 할 삶의 조각들을 모으면서 이어진다. 딸, 손녀 들까지 강인하고 다채로운 여성들의 계보가 펼쳐지는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건너갔다가 유명한 화가를 만나 독일로 가는 등 그 시대 여성 같지 않게 특이한 삶을 살았지만 그만큼 시대의 한계에도 크게 부딪히고 꺾였던 심시선... 21세기를 사는 손녀들은 20세기 할머니를 존경하다가도 안쓰러워하고, 원망하다가도 이해하려 애쓴다.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선이 쓴 대로 '어떤 자살은 가해'였고, 그 가해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원망해버렸는지도. 화수에게 시선은 어른 그 자체였고, 그 어른이 무겁고 더러운 사슬 같은 것을 앞에서 끊어줘서 화수에게까지 오지 않도록 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겼던 듯했다.
나도 어른이지.
언제까지고 딸, 손녀, 보호의 대상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어른으로 살 수 있지? 이미 어른이지만 제대로 된 어른으로?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183p.


심시선 집안사람들은 모두 교양 있고 쿨해보이지만 그걸 허용하지 않으려는 폭력적인 세상에서 상처를 받았다. 특히 화수는 회사에서 겪은 한 사건으로 PTSD에 시달린다. 여성으로서 날마다 모멸감을 느끼고(15p.) 공기가 따갑다고 느끼는(322p.) 화수를 비롯한 손녀들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각자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의 끝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를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심시선이 재혼으로 얻은 딸 경아와 친모녀 같은 사이를 유지했던 것처럼 소설은 혈연관계를 넘어선 유대와 연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을 보고 돌아온 듯한 스태프는 방을 안내해주고 매일 저녁 열리는 영화 상영회의 오늘 영화를 알려주었다. 참석비는 무료, 외부 음식을 먹어도 되고, 주류만 원할 경우 유료라고 했다. 안락한 라운지 공간에 저녁으로 싸온 음식을 풀면서 조금 미안해져 술은 못 마시고 콜라라도 사려고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팔지 않는다고 하던 스태프가 나중에 자신이 마시던 게 있는데 김이 다 빠져도 괜찮으냐며 한잔을 따라주었다. 새로 뚜껑을 딴 탄산음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톡 쏘는 맛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밤의 공기는 부드럽게 감겼다. 스태프도, 다른 게스트들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숲 속에 숨어 있는 이 숙소를 찾아왔다는 친밀감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자동차로도 한참 들어가던 숲길을 걸어 나와 버스를 오래 기다리면서는 그냥 어제 부모님과 같이 돌아갈 걸 왜 사서 고생인가 싶었다. 하지만 취향이 완벽히 겹치지 않는 일행과 협의된 목적지를 빠르게 이동하면서는 어젯밤과 같이 낯선 사람들과 무언의 교류를 할 수도, 버스 밖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빠질 수도, 그러다 누군가를 부르거나 사진기를 꺼낼 틈도 없이 찰나의 신비를 마주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 이 순간을 위해 여행을 왔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느낌을, 서핑에 도전하고 성공했던 느낌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어느샌가 편한 것을 찾게 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것에 익숙해지면 몸과 마음도 경직되어버릴지 모른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내 주변의 공기는 부드럽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함부로 나를 규정하거나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고 항상 열려있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원책방 북스테이 유튜브 보러 가기:

https://youtu.be/2XUv8tY3B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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