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티프원'은 그 용어가 생기기 전부터 알고 가고 싶었던 첫 "북스테이"* 공간이다. 파주의 예술가 마을 헤이리에서 책과 사람을 좋아하는 이가 자신의 서재를 개방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데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열망이 크다 보니 완벽한 순간을 위해 방문을 미루게 되었다. 뭔가 의미 있는 날이어야 할 것 같았고, 사장님이 찾아온 손님들을 "사람책"이라 부르며 그 만남을 기록한 『여행자의 하룻밤』을 읽고 나서는 사장님과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된 후여야 할 것 같았다.
*북스테이는 '모티프원', 『여행자의 하룻밤』을 펴낸 남해의봄날이 통영에서 잠시 운영했던 '봄날의책방', 이 시리즈 첫 화에서 소개한 강화도 '국자와주걱', 괴산 '숲속작은책방' 등이 모여 북스테이 네트워크를 결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고 알고 있다.
서울로 이사 오고 나서도 버스 한 번이면 닿는 곳이지만 마음먹기가 어려웠다. 가까운 출판도시, 임진각을 가면서도 은근슬쩍 피했던 것이다. 그러다 이번 추석, 코로나19로 고향에 가거나 여행을 떠나기에도 마땅찮아 연휴 마지막 이틀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헤이리 마을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 딴판이었다. 추석 연휴 막바지라 그런지 차례 등 의무를 모두 마친 사람들이 근교 여행에 몰린 것 같았다. 입구가 한참 남은 지점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하더니 마을에 들어와서도 주차할 빈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겨우 주차를 하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고즈넉한 마을을 상상했지만 각기 다른 디자인을 뽐내며 지어진 거대한 건물에 서울 시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상점이나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그나마도 아까 우리 가족처럼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한 듯한 차가 거리를 뱅글뱅글 도는 바람에 편히 걸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구경 삼아 나를 파주까지 데려다준 가족을 보내고 바로 숙소로 갔다.
다행히 숙소는 그 혼란 속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를 찾지 못해 조금 헤맸다. 마당에 작은 숲이 우거져 있어서였는데, 덕분에 서재에서 통창으로 자연을 내다보면서도 밖에서 이쪽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있었다. 서재 한쪽 구석에서 작업에 집중하고 있던 사장님이 내가 들어가도 모르고 있다가 인사를 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나중에 읽은 방명록에 사람들이 써놓았듯 도사 또는 신령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아우라와 달리 친근하게 1층 서재와 부엌을 비롯한 공용공간과 2층 방을 안내해주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ㄱ자로 난 창문과 그 곁의 긴 원목 책상이 눈에 띄었다. 이사를 하고 난 뒤 제주를 제외하고는 첫 북스테이 여행이었다. 이제 집에서도 작업이 가능했기에 일부러 짐을 싸들고 돈을 써가면서 북스테이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새 집에서 제일 만족도가 높은 것이 바로 가로로 긴 책상이었다. 컴퓨터를 펼치고 다 읽은 책의 인상 깊었던 구절을 옮겨 적으면서 참고할 만한 다른 책 두세 권을 쌓아놓고 동시에 메모지와 다이어리를 뒤적여도 공간이 충분했다. 그리고 그만큼 내 사유의 범위도 넓어지는 것 같았다.
하룻밤 다녀가는 손님을 위해서도 이런 공간을 마련해놓았다는 점이 감동이었다. 거기다 도시의 1층에 위치한 내 집과 달리 넝쿨식물이 감싸는 창문으로 마당을 내다볼 수 있으니 더욱 좋았다. 시간에 따라 햇빛이 다르게 들어왔고 그때마다 넝쿨식물이 다양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당에는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트레일러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제야 사장님이 여행 기자로도 오랫동안 활동한 여행 마니아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가족을 꾸리고 계속 여행을 할 수 없으니, 대신 세계를 집으로 불러오고자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고 했다. 이제 드디어 살만한 집을 얻었다고 금세 여행이나 다른 사람에게 흥미를 잃고 집 안에 혼자 숨어 안주하고 있었던 스스로가 반성이 되었다.
사장님은 처음 도착한 나를 안내하면서 서재를 자유롭게 이용해도 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과연 내려갈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쓰고 있어서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방해가 될까 얼른 자리를 비켰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때로는 차를 챙겨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기도 하는 듯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모았다 열었다 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안정된 삶을 꾸리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얻고 난 뒤에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습관 때문에 방향을 잃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나 살아온 세월과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로 인한 내공으로 툭툭 던지는 말씀에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사장님에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우울한 마음을 털어놓게 되었다. 뚜렷한 해결책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 대화만으로 고민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숙소에는 책이 가득했지만 방 안 방명록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이 방을 다녀간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감정들에 공감이 갔던 것이다. 방명록으로 쓰는 노트는 자체 제작했는지 하드커버 표지에 사장님의 초상화와 모티프원에 대한 소개가 새겨져 있어 책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과연 방 안에 현재 진행형으로 쓰이고 있는 방명록 전에 10여 년 동안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노트들은 서재 책장 한 칸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손때 묻은 각양각색의 노트가 서재의 다른 어느 책보다 소중하고 귀해 보였다. 여길 다녀간 사람들이 사장님의 표현대로 "사람책"이 되어 서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사장님은 언제든 놀러 와서 서재를 이용해도 된다는 작별인사를 건네주었다. 마을은 아직 관광객이 모이기 전이라 평화로웠다. 천을 따라 걸으며 드디어 마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획일화된 풍경 속에서 나를 보고 짜증스러워했던 내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져 새로운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