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테이] 이후북스테이 점숙씨, 영월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강원도의 굽이진 산길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시가 있다. 바로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었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상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이번 여행 한계령 근처 한 고개를 넘으면서 남자친구에게 이 시를 읊어주었다.
올 초 대화가 통하고 취향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연애를 시작하면 반복되는 일상에 활력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해주고 싶어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주말이 금방 지나갔다. 직장에 매어있는 평일을 견디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나의 꿈을 이해하고 잠재력을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나다 보니 그것을 빨리 펼치고 싶어 초조했다. 무엇에도 제약받지 않고 단 둘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자유롭게 뻣어나갈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코로나19 전 혼자 다녔던 북스테이가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막 시작되던 10월, 연휴를 이용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고립되기 위한 길을 나섰다.
북스테이를 다닌 이후로 여행지를 정한 후 그 지역 내에 갈만한 숙소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숙소를 먼저 정하고 그 지역을 여행하게 된다. '이후북스테이' 2호점 '점숙씨'를 예약하고 그제야 알아보기 시작한 숙소가 위치한 영월 정보. 다행히도 호스트가 예약 확인과 함께 주변의 명소와 맛집을 담은 문자를 보내주었다.
그중 한 곳인 청령포에 들렀다. 어린 나이에 삼촌(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였다고 한다. 복위 운동이라도 일어날까 세상과 접촉할 수 없는 먼 곳을 고심해서 택했을 테니 이곳이 얼마나 먼 산골짜기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이곳은 키 큰 소나무들만이 무심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시내의 오래된 다방에서 쌍화차를 마시고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사들고 숙소로 향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 깜깜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은 험하다며 사장님이 알려준 길로 접어들자 논밭이 펼쳐졌다. 거기서도 한참을 가자 '이후북스테이' 1호점이 나왔고 더 안쪽 막다른 길에 2호점 '점숙씨'가 있었다. 1호점에서 다른 손님들과 놀고 있던 강아지들이 차 소리를 듣고 신이 나 달려와 맞아주었고, 사장님도 곧 도착해 독채 숙소 안을 함께 둘러보며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모녀가 함께 운영하는 이곳의 2호점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본인 이름과 같은 공간을 꾸민 이의 애정이 뚝뚝 묻어 나오는 곳이었다. 책과 LP 뿐만 아니라 부엌에는 세계 곳곳에서 모았을 소품들이 가득했다.
도착했을 때는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 통창 밖으로 소나무 숲이 장관이었다. 여행을 시작하던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을 걱정했으나 막상 나가자 뇌의 끼인 때를 씻어내는 듯한 청명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 덕분일까, 도시의 매연과 소음 대신 새소리와 닭소리가 함께 하는 곳에서 드물게 일찍 상쾌한 기분으로 깬 나는 창을 마주한 소파에서 책을 느긋하게 읽었다.
이곳 숲 속 숙소와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동생 부부와 함께 숲에 휴가를 왔다가 동생 부부가 시내에 나간 사이 투명한 벽이 생겨 고립된 여자에 대한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소설 『벽』. 투명벽 밖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냇가에 물을 떠먹으려던 노인이 그 동작 그대로 멈춰있고 날던 새가 떨어져 죽어 있는 등 바깥은 식물을 제외한 생명체들은 모두 죽은 상태다.
이 책이 쓰인 1960년대에도 인류는 종말을 두려워했는지(그러고 보면 저자는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냉전시대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저자가 죽고 난 뒤 1980년대 핵전쟁 위협을 계기로 서구에서 널리 읽혔다는데, 한국에서는 2020년에 출간되어 코로나19 팬데믹의 문제의식과 공명하고 있다니, 세상은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았나 암울해지기도 한다.) 매부가 강박적으로 갖춰둔 비상물품 덕택으로 얼마를 버티다가 주인공은 스스로 장작을 패고 사냥과 낚시를 하고 들판을 배회하던 암소 벨라를 거둬 돌보고 농사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매일매일의 기록을 따라 읽으며 결말이 어떻게 날까 궁금했다. 바깥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가 그녀를 구하러 올까? 아니면 그녀가 바깥으로 탈출해 다른 생존자들을 만날까?
놀랍게도 벽 안에 사람이 하나 더 살았던 것으로 밝혀진다. 주인공이 고원에 소들을 풀어놓고 계곡에 일을 하러 다녀온 사이 한 남자가 도끼로 암소가 낳은 송아지를 죽인 것이다. 나라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인간이기에 왜 그랬냐, 이제껏 어디 있었냐,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의논이라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와 대화를 전혀 나누지 않고 총을 가져와 쏜다. 그리고 죽은 송아지만 생각하지 인간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사실 소설 중간에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 함께 벽 안쪽에 갇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자신을 부려먹을 거기에(그게 인간의 본성이라 믿는다) 또 자신보다 능력이 모자란 사람은 그에게서 부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거기에 혼자 있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이 둘 이상이면 어쩔 수 없이 사회가 형성되는 것인가 보다. 혼자 살아가면서 주인공은 벽 바깥에서 자신이 사회의 눈을 의식하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자신의 본질과 거리가 먼 것 중에는 "여자"라는 만들어진 개념도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여자라는 의식도 사라졌다. 나보다 더 현명한 내 몸이 벌써 환경에 적응하며 여성스러움을 유지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축소해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맘 편히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딸기를 따러 다니는 어린아이였다가, 장작을 톱질하는 청년이 되기도 했고 페를레를 야윈 무릎 위에 앉혀놓고 벤치에서 지는 해를 바라볼 때는 아주 늙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지금은 그때 가지고 있던 묘한 매력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더 말랐지만 몸에는 근육질이 생겼고 얼굴에는 온통 잔주름이 잡혔다. 보기 흉할 것도 없지만 매력적이지도 않다. 사람의 모양새라기 보다는 나무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갈색 나무 그루터기 말이다.
-112p.
혼자 외딴곳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떠오르면서도 그와는 완전 대비되는 점들이 많았다. 『로빈슨 크루소』가 남자 주인공이 섬에서 자신이 떠나온 사회를 재현하고 결국에는 탈출에 성공해 사회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면, 『벽』은 사회의 허물을 벗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로빈슨 크루소』에서 주인공은 섬의 또 다른 인간 프라이데이를 하인으로 부리고 교화하지만, 『벽』의 주인공은 소에게서 젖을 얻긴 하지만 자신의 필요를 뛰어넘어 소와 고양이와 개를 돌보며 가족을 이룬다.
...고양이 새끼가 태어난다면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나는 고양이들에게 무심하기로 작정했다가 결국은 그들을 또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다시 잃게 될 것이다. 마음을 줄 대상이 남김없이 사라진 데 안도감이 드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망갈 길은 없다.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부류였다면 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이 샘터에서 쓰러져 돌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도 이해 한다. 사랑을 하고 다른 존재를 돌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살생하고 파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반면 아이를 죽이는 일은 10초면 끝난다.
-226p.
이 뒤에는 송아지 얘기가 길게 이어진다. 아이와 송아지를 등가에 놓는 것이다.
송아지도 크고 힘센 소로 자라는 데 1년은 걸린다. 그러나 도끼만 두어 번 내리치면 소를 죽일 수 있다. 벨라가 새끼를 몸속에서 키우던 그 기나긴 시간과, 새끼를 낳던 그 고통의 시간과, 어린 송아지를 늠름한 수소로 키워낸 날들을 생각해본다. 태양은 뜨겁게 타오르고 풀은 풍성하게 자랐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물이 솟아 송아지의 목을 죽여 주었다. 시시때때로 빗질을 해주고 솔질도 해주어야 했으며 배설물도 깨끗이 치워주었다. /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추악한 만행이었다.
-227p.
주인공은 때로 누군가 와서 읽을 것도 아닌데 기록을 남기는 것에 대해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의미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주인공은 사랑을 주었던 대상이 죽어 상처를 입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사랑에 빠진다. 그렇기에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헛된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살았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어떤 일의 의미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일일 뿐이라는 사실을 허영심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인간들도 안쓰럽다. 그들은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삶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인간이 가장 불쌍할지 모른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어서 자연의 순환을 막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절망적으로 만들었으며 흉하게 만들고 말았다.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보다 더 현명한 감정은 없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받고 있는 사람 모두가 삶은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만이 나은 인생을 살아갈 유일한 희망,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 331-2pp.
체크아웃을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던 길, 분홍색 꽃 향연에 차를 멈췄다. 이제껏 메밀꽃은 모두 하얀색인 줄로만 알았는데 붉은메일꽃이라고 했다. 초록빛 동강과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디서 광고 같은 것을 보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겨울 하얀 눈 속 고립 대신 붉은 꽃들 안에 파묻혔다. 사회에서 벗어나 남자친구와 둘만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자가 맞았다. 이러한 경험이 삶을, 그리고 돌아가 마주할 반복되는 일상을,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