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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Oct 30. 2022

유일무이한 존재, 유일무이한 관계

선교장, 강릉 / 『A가 X에게』 존 버거

나의 엎드린 사자

미 구아포 Mi Guapo: '나의 멋쟁이' 정도의 애칭으로 쓰이는 스페인어

하비비 Habibi: '내 사랑'이라는 뜻의 아랍어

카나딤 Kanadim: '(비행기의) 날개'를 뜻하는 터키어 '카나트(kanat)'에서 따 온 애칭

미 소플레테 Mi Soplete: '나의 횃불'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야 누르 Ya Nour: 이집트의 춤곡에 나오는 사랑의 표현

하야티 Hayati: '활기찬' '생명력 넘치는'이라는 뜻의 터키어로, 여기서는 '나의 삶' 정도의 애칭

미 골론드리노 Mi Golondrino: '내 겨드랑이에 난 종기 같은 당신'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미 카디마 Mi Kadimo: '앞으로'라는 뜻의 히브리어이자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로, 여기서는 '나의 미래' 정도의 애칭


『A가 X에게』에서 아이다(Aida)가 사비에르(Xavier)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쓰는 애칭들이다. 사랑 편지이기에 별로 어렵지 않은 이 책의 주석 대부분은 이 단어들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었다. 이 정도면 생각할 수 있는 호칭은 다 나오지 않았나 하고 있다가 '내 겨드랑이에 난 종기 같은 당신' 같은 표현을 보고는 허를 찔리고 말았다. 사랑하는 상대를 유일무이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세계 공통인가 보다. 그 기발함이 감탄스러웠다.


나에게 이 책은 각별한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으로 존 버거를 알게 되어 그의 저작들을 따라 읽다가 『제7의 인간』으로 석사논문까지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존 버거의 책을 한국에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 출판사 열화당에도 마음이 기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열화당'은 설립자 이기웅의 고향집 강릉 '선교장'의 사랑채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곳이 숙소로도 운영된다고 해서 벼르다가 이번에 남자친구와 다녀왔다.


궁궐 외에는 100칸 집을 지을 수 없던 시절 99칸으로 지어졌다는 선교장. 일반 관람 마감 시간인 6시 하고도 한두 시간이 지나 도착해 깜깜한 가운데서도 저 멀리 보이는 기와들에 그 옛날 위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관리실에 말하니 닫아놓았던 출입구를 열어주었다. 금지된 곳에 발을 들여놓는 듯했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까지 더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별당, 연지당, 중사랑, 행랑채, 초가, 홍예헌 등이 숙소로 쓰이고 있는데 우리는 그중 연지당에 묵었다. 집안의 일을 도와주던 여인들이 기거하던 곳이라고 했다. 한옥이라 그래서 걱정했던 것에 비해 난방이 잘되어 따듯하고, 깨끗하게 세탁된 요와 이불을 펼치자 아늑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할머니 댁에 놀러 간 기분이 나기도 해서 이불 속에 들어가서 남자친구와 밤늦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미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지만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던 차 내가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낸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비혼주의자였다. 나의 내밀한 사랑을 국가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은 계속 성장하고 변하기 마련인데 지금의 감정으로 평생 동안 나를 또는 상대를 속박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은 사랑이 다가 아니라고, 철없는 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대로 결혼이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결합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가족 제도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들어가 사회가 기대하는 아내,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사소하게는 비슷비슷하게 찍어낸 듯한 결혼식에도 환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둘 만의 비밀 장소에 와 있는 것 같은 지금은 한옥에서 전통결혼식을 올려도 좋겠다, 의미 있는 곳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모아 축하하는 자리를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엇보다 관계 안에서도 나를 고유하고 독립된 존재로서 존중해주는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고 나서는, 그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해나가는 모험을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사회 제도 안에서 나를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듣고 나서 남자친구는 나에게 그걸 구속이라 생각하지 말고 혜택을 누리고 이용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A가 X에게』에서 아이다가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사비에르가 테러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아 수감 중이기 때문이다. 아이다는 사비에르와 부부 사이가 아니라 감옥에 면회를 갈 수조차 없다. 여러 차례 결혼 신청을 하지만 "그들"에 의해 거부당한다. 가상의 나라와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그들"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비에르가 편지 뒷면에 남긴 반자본주의, 반세계화 메모들에서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화하려는 신자유주의 세력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게 사랑은, 그리고 결혼은 제도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게 사비에르와 같이 활동가이기도 한 아이다가 (검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거대한 이론 얘기 대신 자신과 이웃의 일상과 연인과의 추억, 서로만이 기억하는 신체적 특성 같은 어찌 보면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을 노동력 또는 시장으로만 보려는 세력에 맞서 개성을 지키는 것이 저항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관광객이 들이치기 전에 선교장 안을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었다. 강릉에 위치해 관동이나 금강산으로 향하던 이들이 잠시 쉬어가며 풍류를 즐겼을 사랑채 열화당. 러시아 공관의 선물이라는 한옥에 덧대어진 서양식 차양과 지금도 매일 연주된다는 오르간의 조화가 이곳에서 이뤄진 여러 교류들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묵은 연지당도 집안의 혼자가 된 여인들이 일을 도우며 지낼 수 있게 품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 끝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떻게 서로를 돌보고 사회와 소통할지는 나와 남자친구에게 달렸다.



체크아웃을 하고 바로 나가기 아쉬워 입구 근처 카페에 들렀다. 열화당의 책을 진열하고 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가지고 온 『A가 X에게』를 읽었다. 이 책을 마저 읽은 후 나도 남자친구에게 긴 편지를 써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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