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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Jul 24. 2022

고여 있는 시간

[북스테이] 가고파 그집, 고흥 / 『낙원』 압둘라자크 구르나

(브런치북 주: 사실 남자친구와는 강원도 전에도 북스테이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남자친구와 서로의 고향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같이하는 여행. 여러 후보들 중 남자친구가 여수를 강력히 주장했다. 사실 나는 엑스포 전후로 여수에 가족과 한 번, 친구와 한 번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 별 감흥이 없었기에 그리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렇게 여수에 가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남자친구도 티를 내진 않았지만 도시 생활에 지쳐 있었구나 싶어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고 싶어 저장해 뒀다가 너무 멀어 엄두를 내지 못했던 한 숙소가 생각이 났다. 여수 바로 옆 고흥에 있는 ‘가고파 그 집’이었다.



KTX를 타고 여수에 가 차를 렌트해 고흥으로 넘어갔다. 두 지역 사이 섬들을 다섯 개 다리로 이어 만든 드라이브길이 장관이었다.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게 정말 도로에 우리밖에 없던 순간들이 계속되었다. 숙소 역시 고흥 본섬에서 떨어져 나온 나로도(맞다. 나로호가 이름을 따온 나로도!)의 한 곶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내를 따라 아무 건물도 없는 도로를 한참을 달리다 언덕을 오르니 그 끝에 숙소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날은 관광을 하느라고 해가 다 진 뒤 어두컴컴할 때 들어와서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 방 안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앞마당도 아니고 앞바다를 가진 느낌이었다.


방구석 일출


'가고파 그 집'의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숙박을 예약하면 도서 한 권을 신청해 받을 수 있다. 나는 바로 전 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 막 한국에 번역본이 소개되고 있는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을 신청했다. 조금 늦게 신청했더니 둘째 날에 받을 수 있었는데, 탁자 위에 선물처럼 놓여있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댔다.



이곳은 또한 2박 이상 연박을 하여야 머물 수 있다. 관리의 어려움 때문인 것 같긴 하지만 덕분에 여유를 즐기기에 좋았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1박만 하고 허겁지겁 떠나는 건 아쉽지 않은가. 주변에 관광지가 많이 개발이 된 편은 아니라서 우리는 첫째 날 분청문화 박물관과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 문학관을, 둘째 날에는 소록도와 연홍도를 방문하는 것 외에는 숙소에서 계속 쉬었다.


특히 별채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숙박동에서 나와 좁은 숲길을 내려가면 아담한 집이 나오는데 그곳이 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남자친구와 각자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낙원』은 내가 독서를 하고 있는 고흥의 잔잔한 바다와 달리 격동의 인도양을 무대로 하고 있다. 구르나는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몇 년 만의 아프리카 출신 작가의 수상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책의 주인공들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아프리카인이 아니다. 이슬람을 믿는 아랍계 상인이다. 저자 역시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인도계 무슬림으로 잔지바르 혁명 후 영국으로 망명했다. 알고 보니 영국이 식민주의를 펼치고 있던 당시 인력 보급을 위해 인도인들을 아프리카와 남미로 이주시켰고, 후에 독립을 한 나라들은 식민 잔재를 몰아내면서 인도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 등 유럽 세력이 오기 전부터 동아프리카는 인도와 아랍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무역항이었는데 핍박받던 역사는 자신들과 다른 존재들을 배척하게 만든 것이다.


책에는 소년 유수프의 눈으로 유럽인들이 모든 걸 바꿔놓기 전 내륙으로 원정을 가는 카라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서로의 종교와 풍습을 놀리면서도 교역을 하면서 어우러져 살던 옛 동아프리카의 모습이다. 유수프는 어릴 때부터 이국적인 향기를 몰고 오는 아지즈 아저씨를 동경해오던 차, 어느 날 그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에 가게 되고 자신이 지내는 곳 너머로 아저씨가 지내는 울타리 쳐진 화려한 정원을 "낙원"이라 부르며 궁금해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부모님의 빚 때문에 아지즈에게 팔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 정원 안 자신과 비슷한 신세의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인들에 대한 불길한 말들이 떠돈다. 자신이 있는 곳이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소년의 성장담이자 저물어 가는 한 시대를 담은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남자친구가 이직을 하게 되면서  직장과 다음 직장 사이 틈을 이용해 다녀온 것이었다. 따라서 평화로우면서도 서울에 돌아갔을  새롭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긴장감이 함께였다. 하지만 울타리 쳐 고여 있는 낙원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깐. 잠시나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힘을 얻어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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