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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Oct 29. 2022

보이지 않는 것을 듣기

[북스테이] 명파아트호텔, 고성 / 『짐승일기』 김지승

고성의 아트호텔에서 김지승의 『짐승일기』를 읽었다. 내내 투병 일기구나 하다가 책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내가 단어를 부주의하고 게으르게 썼음을 깨달았다. 저자는 자신의 상태를 "병과 몸을 이분법으로 나눠 대결"시키는 투병이나 "앓아 누운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와병 중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다가 예전에 머문 적이 있던 절의 주지스님의 편지에서 영감을 받아 관병이란 단어를 만든다. 불교에서 관(觀)은 "지혜로 경계를 비추어 본다는 의미"(224p.)라고 한다. 병을 헤아리며 살피며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저자는 언어에 무척 예민하다. 나는 3년 전에 "여성적 글쓰기는 가능한가"라는 부제를 가진 저자의 세미나 수업 《메두사의 웃음으로》를 듣기도 했다. 책에 그 수업에서 함께 읽었던 작가들이 언급되어서, 그리고 수업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와서, 아니 책이 거기서 실험했던 글쓰기의 방식으로 쓰여서 반가웠다. 권력자들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기지 못한, 삐져나온 것들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명명은 명사가 권력과 손잡고 하는 행위의 핵심. 너는 여자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긴 시간 조형된, 여자라는 개념 안에 갇힌다. / 갇혀서 탈출의 언어를 고심한다. 고심하며 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교도관처럼 엄격해진다. 말들이 교도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내 말들이 내 마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세계는 불행하다. 그 마음이 정말 내 마음인가 묻다보면 더 불행해지는 세계. 그렇다면 이야기를 바꾸자, 하고 오늘은 용기를 내 다시 앉았다. 명명은 놀이로, 놀이는 술래 없이, 권력은 사람 말고 지구에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치면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묻자. 화자에게 당신은 그럴 힘이 있다고 말해주자. 화자가 자기 힘을 믿어야만 세상에서 이야기가 그 존재를 배정받게 됨을 기억하자. (...) 내가 쓰면, 삼 초 전에 세상에 없던 문장이 갑자기 나타난 거다. 말들의 세계는 바쁘게 이 새로운 문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118p.


일기의 제목 "짐승"이란 초등학교 시절 저자의 이름 앞글자에 ㅁ 받힘을 더해 놀렸던 동급생에 의한 1차원적인 별명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집중하는 지워진 존재, 차별받는 존재를 아울러 일컫는다는 점에서 예지적인 것이기도 하다. 권력자들의 언어를 비워낸 후 저자는 고민한다.


언어의 자리가 텅 비어버린 지금, 매일 생각합니다. 울까, 짖을까, 으르렁거릴까.
-250p.


현대 사회에서 질병은 타자화 된다. 건강한 신체=노동력이 표준인 사회에서 질병은 일시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이다. 아픈 몸은 없는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 몸의 이항대립인 질병과 같이 남성의 이항대립으로서 여성도 내내 비가시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픈 여자가 이중으로 고통받는 이유일 것이다.


저자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키를 보다 극의 진행을 돕는 쿠로코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쿠로코는 검은색 옷을 입고 무대 장치를 옮기거나 조정한다. 아무리 막의 배경과 같은 색상의 옷을 입었다지만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없음', 無를 의미했다. 무대 위에서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모습을 감췄다가 필요할 때 나타나는지 관객들은 모두 보고 있으면서도 그 자체가 '없음'이므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암묵적으로 함의된 부존재의 존재. 그는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감싼 채 무대 위 배우들의 옷을 벗기거나 입히고 소품을 전달하거나 이동시킨다. 대사도 극적 역할도 없다. 극의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극이 흐르도록 물길을 터준다. (...) 친구도 그가 우리 종족일 거라는 데는 선뜻 동의했다. 생략되고 격리되고 증발되며 말살되고 은폐되는 종족의 일원으로 그를 발견할 수 있어 기뻤다. (...) 두번째 극이었나. 스토리상 한 여자가 자결한다. 여자의 죽은 몸은 여전히 무대 위에 있고, 나머지 배우들이 극을 진행하는 가운데 쿠로코가 홀연히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두른 것과 꼭 같은 검은 천을 여자의 죽은 몸 앞에 드리워 관객들의 시야를 가린 다음, 여자와 함께 천천히 무대 밖으로 움직인다. 한 여자가 쿠로코, 바로 그처럼 '없음'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을 나는 조금 전율하면서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위장하면서.
-268-9pp.


마찬가지로 우리는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에 감은 눈을 한다. 명파아트호텔은 우리나라 최북단 명파해변에 방치되었던 낙후된 숙박시설을 아티스트들이 변모시킨 것이다. 단순히 호텔방 안에 작품을 들여놓는 것이 아니라 8명(팀)의 아티스트들이 8개의 객실을 각각 맡아 숙박 경험 자체를 예술로 만들었다. 궁이나 산수화, 예술가의 작업실을 모티프로 한 방들도 있었지만 내가 택한 방은 오묘 초 작가의 'Weird Tension'. 방 이름 그래도 이상한 긴장, 불편함을 키워드로 여기가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남한과 북한은 종전을 한 게 아니라 휴전 중일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객실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철조망이 그려진 거실 거울이었다. 실제로 명파해변은 DMZ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는 군 통제지역이라고 한다. 수납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성긴 선반에서 찾은 베개와 쿠션에도 역시 철조망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다행히 머리를 대었을 때 뾰족한 게 올라오지는 않았다. 바닥에 눕자 천장에 달린 티비가 보였다.


한참 티비를 보다가 찾은 화장실. 어느 것을 돌려야 할지 알 수 없게 따닥따닥 붙여진 손잡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돌리고 들어가자 걱정했던 것보다 깔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화장실이 나타났다. 안심을 하고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을 때에야 세면대 위에 걸려있어야 할 거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석에는 방범 거울이 대신 놓여 있었다. 가지고 들어온 수건을 걸려고 하자 수건걸이가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설치가 되어 있어 수건이 쭈욱 미끄러진 것은 이쯤 되면 당연한 일이었다.


방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벽지에는 코로나19와 기후위기를 나타낸 벽화가 있었고, 천장에는 불길한 불빛을 뿜어내는 조명이, 그리고 상판이 기울어져 뭔가를 올려놓을 수도 없는 베드테이블이 있었다. 자려고 눕자 문에 뚫린 구멍으로 무언가 지나가는 것 같은 환영이 스쳤다.



다음날 일어나자 테라스 너머 짙고 푸른 바다의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느낀 긴장은 온데간데없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렇게 나는 다시 전쟁을 잊고 코로나19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코로나19가 여러 위기들을 까발렸지만 못 본 척하고 그저 팬데믹 전, 마스크를 쓰기 전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짐승일기』는 "정상"이라는 안위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그게 아니라고 외치는, "비정상"이라 분류되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침묵당하지 않고 울부짖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발화하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람일까. 파도에 철썩 소리 위에 무언가 위잉 대는 다른 소리가 실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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