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영화제 영화 《나의 집은 어디인가》를 관람한 애관극장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자 유난히 "최초"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인천 구시가지 답사가 생각이 났다.
2018년 도시재생 소셜벤처를 운영하는 지인과 함께 인천 답사를 온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때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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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원래 바다였다는 정보로 시작했다. 여느 도시의 번화가와 다를 바 없이 사방에 건물이 즐비한 이곳이 바다였다니. 아직 한낮이라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나른했고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을 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무리가 내려가는 쪽을 눈으로 좇자 과연 그 길 끝에 푸른 물이 있고, 정박한 배가 거대한 옆구리를 보이고 있었다.
개항 후 들어온 일본인들이 염전으로 쓰이던 이곳을 메우고 대형 선박도 오갈 수 있도록 부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들어선 곳 중 하나가 1896년에 설립된 미두취인소다. 오늘날의 증권거래소라고 할 수 있을까. 소액의 보증금으로 쌀을 사들이고 그 쌀값의 등락에 따라 돈을 벌거나 잃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시스템일 뿐, 조선의 쌀과 곡식을 한 곳에 모아 헐값에 사들여 일본에 비싸게 내다 팔고, 훗날 전쟁 막바지에는 일본군의 모자란 식량으로 보급하는 데 쓰였다.
그 미두취인소가 서있었던 자리 근처에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라 추정되는 인물의 딸이 살았던 자리도 있다. 일본에 건너온 스코틀랜드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와 결혼한 일본인 쓰루코 단카와는 나비가 수놓아진 기모노를 늘 입고 있어 ‘나비부인’이라 불렸으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미국인 소설가와 이탈리아인 작곡가가 비극으로 각색해 각각 소설과 오페라를 창작했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글로버 하나는 영국인 무역상인이자 인천 영국 영사를 지낸 월터 베넷과 결혼해 인천으로 건너와 살았다. 하지만 쓰루코 단카와가 《나비부인》 모델이라는 것은 나가사키 관광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행복했던 글로버 부부의 결혼 생활과 달리 비극적인 오페라 스토리는 일본이 물러간 곳에 들어온 미군과 양공주 사이 이야기들과 묘하게 공명한다.
인천항을 만드는 데 노동을 보탠 이로는 백범 김구가 있다. 일제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총독 암살 사건을 날조해 김구를 포함한 105인을 체포하고 유죄판결을 내린 105인 사건의 결과로 인천에서 노역을 하게 된 것이다. 인천은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도시로, 일찍이 산업화가 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최초의 노동쟁의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은 강경애의 『인간문제』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기념관이나 백범 기념관이 지어지면 참 좋을 텐데, 답사 진행을 해주었던 장회숙 선생님이 기념관 자리로 찍어놓았던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부두 바로 앞 건물에 일본의 대표적 우익 기업인 유니클로가 입점해버렸다니 씁쓸했다.
그 맞은편에는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3동 서있는데 옛 인천세관 부속 창고로 지하철역을 지으면서 자리를 조금 옮긴 것이라고 한다.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공사를 하면서 지하를 파헤쳤을 때, 처음 둑을 짓는 데 쓰였던 소나무들이 나오면서 소나무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그게 누군가의 한 같기도 해서 제대로 알고 지켜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바로 작년 115년 역사의 비누공장 애경사가 관광객 주차장 조성을 위해 허망하게 철거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품 공장 중 하나인데 인천시는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거해버리고는 그 내역을 몰랐다고 발뺌을 한다고 한다.
서울과 가까운 개항지인 인천에는 유난히 최초가 많다. 인천 하면 떠오르는 차이나타운이 된 청나라 조계지를 포함해 각국 조계지가 조성되면서 각자 교회를 세우고(예를 들어 최초의 성공회교회인 내동교회, 감리회교회인 내리교회가 있다) 산업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외국에서 지은 최초의 신사도 인천에 있었다. 지금은 인천여상이 되었지만 학교를 둘러싼 돌담으로 얼마나 위용 있게 지었을까 짐작할 수 있다. 함께 들어온 사찰, 유곽 등으로 일본인 마을이 만들어진다. 그중 고위관리급이 살았다는 마을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자연과 단독주택이 잘 어우러진 마을이었다. 그런데 여기도 아파트 건설을 위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이 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웠다.
돌담을 얼마나 정교하게 쌓았는지 보라
인천의 3대 산업으로 쌀과 양조, 소금을 꼽는다는데 세 가지 모두 공장 굴뚝 하나씩만 남았다. 그나마 정미소는 그 많던 공장이 다 사라지고 마지막 공장이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거되면서 기념으로 벽과 굴뚝만 살려놓은 것이라고 했다. 남은 공장과 창고에 예술인들이 둥지를 틀어 작품 활동을 하고 마을을 살리려 노력하는 모습은 그래서 보기 좋고 응원하게 된다.
소금창고로 지어졌다는 “잇다스페이스”에는 방치된 시간 동안 내부에서 자란 오동나무가 있다. 그리고 목공예자 정희석은 나무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해내어 예술로 승화하는 경력을 살려 그 건물의 이야기를 녹여내는 공간 운영을 하고 있다.
막걸리를 제조하던 인천양조장 건물에서 여러 예술가들이 술 대신 예술을 빚어내는 “스페이스 빔”도 있다. 최근 인천시가 관광센터로 바꾸려는 것을 대표 민운기를 비롯한 시민들이 모여 공동 매입, 시민자산화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곳이다.
“스페이스 빔” 일대가 배다리 마을로(예전에는 여기까지 배가 닿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개항 후 일본인들에게 쫓겨난 조선인들이 정착해 조성한 마을이라고 한다. 조선인 학교, 장터 등을 세워 근대문화를 일군 중요한 곳이지만 최근에는 산업도로로 마을이 두 동강 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쫓겨나서도 마을과 문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지금 주민들도 배다리 마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터줏대감인 “아벨서점”을 비롯한 여러 헌책방들과 요일마다 다른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요일가게” 등을 주축으로 마을학교가 열리는가 하면 도로를 위해 철거된 공터에 마을 사람들이 텃밭과 꽃밭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꽃밭에 대한 배경 설명을 듣지 못하고 닿았을 때 나는 이곳이 유토피아로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답사 내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거기서 자생적으로 문화와 예술을 일구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서울에서의 바쁜 일은 모두 잊고 여기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양귀비와 라벤더 등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자 숨이 탁 멎고 만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 드라마 촬영을 하는 곳들이 유독 많았다. 오래되고 독특한 건물과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지속가능한 형태로 계속 가꿔나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인천에 자주 오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