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따뜻함을 넘어선 방에서의 잠은 생각지 못한 느낌이 있다.
감기가 오지도 않았지만 떨어져 나갈 것 같다거나, 얼굴이 땡땡 부은 채 번들거린 다던가, 자면서 숨을 쉬지 않은 것 같다거나, 코가 막힌 듯 맹맹한 것이 그런 느낌이다.
유독 거세고 찬 바람을 맞은 몸과 위기 상황으로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뜨겁게 난방을 올리고 잠든 다음날 모두 땡땡 부은 얼굴로 일어나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의 두려움을 뒤로하고 오늘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
아침을 먹으며 맏형은 오로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이슬란드에 오고 싶었던 이유가 그것이라며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다.
오로라는 특정 상황에 발생하는 신비로운 현상이어서 여행 기간 동안에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했고, 겨울에 오로라를 관측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겨울 아이슬란드에 왔다고 했다.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는 예보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해서 시시각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말에 놀라던 찰나 옆에 있던 다른 일행들도 각자 앱과 사이트를 보고 있다는 말을 했다.
오로라 지수라는 것이 있어서 해당 지역에 지수가 높고 날이 흐리지 않다면 볼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다고 했다.
나는 아이슬란드에 오면 오로라를 무조건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를 알지 못했다.
오로라가 뜬다면 우리가 그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장소에 있기를 바라게 됐다.
말이 나온 김에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바라는 것을 물었다.
매일 24시간을 붙어 다니며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되고, 긴 밤마다 각자의 가면을 내려놓으며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의사를 묻기 적절한 시기였다.
또렷하게 바라는 점은 없다는 말로 운을 뗀 둘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가고 싶은 곳들은 기존 계획에 반영되어 있고 이왕이면 오로라를 꼭 보고 싶다고 했고, 막내는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다만 막내의 재정은 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비용 안에 경험을 희망하는 듯했다.
겨울에 할 수 있는 것들 중 동굴 투어, 고래 투어, 온천, 빙하투어, 트레킹 등 기존에 파악해 둔 프로그램 정보들과 기상에 따라 변하는 정보를 일행들에게 알려주며 체험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 보자고 했다.
우리는 달비크(Dalvík)로 가서 고래 투어를 하기로 했다.
숙소가 있는 아르나르스타피(Arnarstapi) 마을을 떠나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아침 산책길 풍경은 뜻하지 않게 장엄했다.
구멍 뚫린 바위 가트클레튀르(Gatklettur) 사이로 하얗게 부서진 파도가 쉴 틈 없이 오고 갔고, 하늘 위로 구멍이 뚫린 기이한 동굴 사이로 밀려온 바닷물이 주상절리에 부딪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동굴을 내려다보려던 둘째는 눈앞에서 솟구친 물줄기에 놀라 뒤로 넘어졌다.
멀리서 고요한 바다는 가까이서 이리도 분주하고 거칠다.
화산지대의 검은 해변과 기암에 부서지는 거친 파도가 먹구름 가득한 하늘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함께 어우러져 인상적인 해안 풍경이었다.
어딘가 제주도와 닮았다.
뒤에 서있는 스타파펠산은 제주도 서남쪽의 산방산 같았고, 해안가는 우도의 절벽이나 용머리 바위, 중문 어딘가를 연상케 했다.
현무암 이라던가 주상절리의 자태와 바람에 탐스럽게 흔들리는 갈대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다 선이 굵고 진하며 억척스러운 느낌이었다.
내 안의 기억과 대조하며 풍경을 천천히 더듬는 동안 일행들은 제각각 흩어져서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많은 여행자들이 여행 중 만난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도 그렇다.
이제는 핸드폰으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어 과거보다 그 행위는 보편적이고 간편해졌다.
과거처럼 뛰어난 화공을 데리고 다니지 않고,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손쉽게 사진으로 찰나를 붙잡는다.
드론을 위로 날려 땅에 붙은 시야를 달리 조명할 수 있고, 영상을 찍어서 연속된 순간을 소리와 함께 남길 수 있다.
기술의 발전만큼 렌즈 너머의 세상은 실제와 근접하게 담겼다.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 이 훌륭한 수단들은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앗아갔고, 천천히 오래 간직하기 위한 노력과 마음도 뺐어갔다.
쉽게 촬영한 자료는 디스크에 쌓여 방대해졌고, 붙잡았다 여겨진 자료는 쉽게 스쳐 지나가고 잊혔다.
그런 자료가 불행히도 소실되면 눈으로 더듬고 마음에 남은 정도만을 희미하게 붙잡을 수 있다.
다음날 '디스크 인식 불가'라는 문구와 함께 내가 가진 32GB짜리 디스크가 망가지면서 그 안에 있던 자료도 함께 소실됐을 때 기억을 상실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 역시 사진과 영상에 찰나를 붙잡고 소유했다 여기며 나중에 다시 볼 생각으로 그때를 자세히 살펴 마음에 담지 않은 탓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선으로 더듬은 아름다움은 장소를 떠난 뒤에도 마음에 선명하다.
산책길에 만난 장엄한 자연에 도취되어 어제의 공포를 잠시 잊은 채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깊은 곳으로 향했다.
아이슬란드 관광청에서 말하길 스나이펠스네스는 눈 덮인 산의 반도라는 뜻으로, 만년설을 머리 위에 쓰고 있는 화산이 긴 반도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얻은 이름이라고 했다.
아이슬란드 육지에서 돌출되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반도는 멋진 해안 도로와 국립공원, 빙하지역, 화산지대 등 다양한 볼거리가 모여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의 축소판이라고 불리고,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아이슬란드를 몸으로 겪고 싶었던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기대한 곳이기도 했다.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는 우리에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나이펠스요쿨 국립공원으로 가는 중에 얼어붙은 길이 나왔고, 우리는 어제의 두려움이 떠올라 군말 없이 차를 돌렸다.
뒤늦게 인터넷으로 도로 상황을 살펴보니 전날 기상 악화로 도로 곳곳이 통제됐고, 오전까지도 눈과 비 소식이 있었다.
전날 경험을 통해 심리가 위축됐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고 이 지역을 건너뛰자고 입을 모았다.
결정에 이견은 없었다.
링로드를 한 바퀴 돌아온 뒤 하루 정도 일정이 된다면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국립공원을 가지 않으면서 생긴 여유로 아이슬란드 서쪽에서 북쪽까지 길게 이동할 수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안했고, 위쪽은 날이 개어 평화로웠다.
다시 1번 국도에 합류하면서 아이슬란드의 풍경 또한 완만한 경사와 부드럽게 흔들리는 갈대밭의 향연으로 온화했다.
이 길을 달리는 동안 우리는 지난밤 경직된 마음이 이제야 완전히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팝송을 크게 틀어놓고 저마다 창문을 내려 아이슬란드의 공기와 풍경을 만끽했다.
차 안에선 핫도그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전자레인지에 데워둔 소시지를 핫도그 번 사이에 끼우고 케첩과 머스터드를 취향만큼 뿌려서 먹는데 탱글탱글한 소시지의 식감과 소스의 조합이 예술이다.
특히 진하고 균형 잡힌 토마토케첩의 맛이 좋았다.
핫도그를 준비하기로 한 서로를 칭찬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재료가 저렴할 뿐만 아니라 준비가 간편하고 이동 중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간식을 대량으로 소비하게 될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드론 하나를 잃어버렸다.
피오르드 옆 황금빛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길에 자동차 CF처럼 영상을 찍어보겠다며 드론을 날린 후 목표물을 따라오는 기능을 설정했는데 그대로 마지막 순간이 됐다.
차가 얼마 이동하지 않았기에 다시 뒤로 돌아간 뒤, 조정 거리를 이탈한 드론이 그 어딘가에 불시착했으리라 생각하여 들판과 길 위 여기저기를 살펴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들판에서 이삭 줍는 농부들처럼 저마다 허리를 숙인 채 드론을 찾는 동안 해가 서서히 뉘어가며 황금빛 햇살을 황금빛 들판에 드리웠다.
그 드론이 여전히 하늘에 떠있는지 어딘가 불시착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슬란드 여행을 위해 구입한 드론을 잃어버린 둘째의 마음을 헤아리니 안타까웠고, 이런 순간이 우리에게 벌어져서 또 하나의 추억거리 아닌 추억거리가 생긴 것에 난처한 헛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찾기를 포기하고 차에 타서 이동하는 동안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하루에 하나씩 사건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드론을 생각한다.
드론은 어디까지 날아가서 떨어졌을까.
동력을 잃을 때까지 자유롭게 날아다녔을지도 모를 드론이 누군가에겐 UFO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가지 못한 빙하의 정상 어딘가에 떨어졌을까.
계속 위로 상승해서 인공위성처럼 떠도는 건 아닐까.
자신의 신호를 잡아줄 주인을 기다리면서.
달비크의 고래 투어를 예약해 뒀기에 근처 도시 아쿠레이리에 숙소를 잡았다.
카레를 만들기 위해 구입한 돼지고기를 팬에 굽고 밥까지 볶아서 근사한 식사를 하는 동안 왠지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로라 지수를 나타내는 앱에서 그런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기에 한 명씩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오로라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