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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별안간 마음에 뜨거운 오기가 솟구쳤다

나는 어느 것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도보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 

 이 여행은 시간보다 체력과 의지의 싸움이다.

 활짝 연 창문 밖으로 여전히 아름다운 포지타노 전경이 보인다.

 매일 새로운 장소에서 눈을 뜨는 여행자의 특권을 누리며 창틀에 앉아있다가 밖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커피 냄새를 참을 수 없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때마침 앞치마를 두른 이가 다가와 조식을 먹으라며 말을 건넨다.

 이탈리아 커피는 양이 적고 진하다. 

 끝 맛에 묘한 달콤함이 맴돌아 마치 초콜렛 같았다.


 지난밤 널어둔 빨래는 대부분 말랐다. 

 양말에 남은 물기는 헤어드라이기로 말리고, 조금 습한 반팔과 반바지는 입었다. 

 더 지체하지 않고 배낭을 들쳐 메고 일어섰다. 

 배낭은 전날 덜어낸 만큼 가벼웠다.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허리와 가슴 끈을 몸에 밀착되도록 당겼다.

 어깨끈까지 모든 끈을 조정하고 나니 무게가 분산되고 안정적이어서 이제야 끈의 존재 이유를 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걸었지만 그 걸음은 도착한 곳에 짐을 두고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걸음이었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음이었다.

 이번 걸음은 오늘의 집을 떠나 다음의 집으로 가는 걸음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포지타노 숙소에서 아트라니 숙소까지 19Km를 간다.


 B&B를 나와서 5분이 채 되지 않아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배낭의 무게는 매섭게 어깨를 짓눌렀다. 

 덜어낸 만큼 가벼웠던 느낌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언덕길을 내려와 포지타노 시가지에 도착했을 땐 많은 휴양객들이 상점을 구경하고 해변을 오갔다.

 그들 사이를 통과해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벌써 멈춰 서면 19km 앞으로 전진할 수 없을 듯했다.

 시가지 끝자락에서 응원하듯 나에게 내밀어진 레몬 첼로를 한잔 받아 마시고 그대로 포지타노를 벗어났다. 

 “그라시아스!” 

 레몬의 싱그러운 달콤함 속에 높은 도수가 유쾌하다.

 시가지를 감싼 곡선의 도로를 지나자 한순간에 혼자가 됐다.


 울컥 눈물이 났다.

 나만 있는 도로를 걸으며 이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게 좋아서 인지 세상에 혼자 나왔다는 자각 때문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홀가분함도 있었다.

 북받친 가슴으로부터 차오른 눈물은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 바다 위에 흰색의 배들이 점처럼 떠서 평화로웠다.

 마음도 차츰 진정되며 풍경을 따라 평화로워졌다.

 배낭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괴롭진 않았고, 시작하면서 흘려낸 땀은 몸이 적응하는 과정이었는지 잦아들었다.

 이따금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 외에 이 도로를 걸음으로 이겨내 보겠다는 사람은 나뿐이다.


 주로 아말피 해안 바다와 길가에 핀 꽃을 보며 걸었다. 

 일전에 김훈 선생님의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 자연과 풍경, 움직이는 것과 멈춰있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배웠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인식하지 않으면 보고도 마음에 남지 않고, 인식하고도 보려고 노력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어서 잘 보기 위해서는 차와 같이 빠른 이동보다는 느리게 움직이거나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이동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보다 잘 볼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발은 걷고 눈은 보고 있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좇다 보면 이내 의식이 침잠하며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가 됐다.

 걷는 동안은 이런 것의 반복이었다.

 최초 3km 지점에 앉아서 쉴 때 전날 산 과일을 먹으며 갈증과 허기를 달랬다.

 어찌나 달콤하던지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행복했다.

 고작 3km를 걷고도 베테랑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어 우쭐했다.


 짐의 무게가 버겁고 다리마저 무거워질 무렵 만난 마을에서 점심식사를 결심했다. 

 프라이아노(Praiano) 7.7Km 지점이다.

 아주 지치진 않았지만 지나온 길이 고작 7.7km라니 놀랍고 허망했다.

 Che Bonta라는 식당 야외석에 앉아 마르게리타 피자 한판을 주문하고, 음료를 되묻는 직원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가벼운 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며 애써 콜라가 간절한 속내를 삼켰지만 서글프진 않았다.

 이런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더욱 여행자스럽다고 느끼게 했다.

얇은 도우의 피자는 두 입이면 한 조각을 먹을 수 있어서 입안 가득히 욱여넣고 그 맛을 즐겼다.

 한국에서 먹던 마르게리타 피자와 구성이 다른 게 없었지만 토마토 베이스의 신선함과 치즈의 풍미가 몹시 좋았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짓눌린 어깨를 펴고 불나던 발바닥도 진정시켰다.

 식당을 나서는 길에 아말피 해안을 오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의지가 약해지기 전에 배낭끈을 꽉 잡고 그들 옆을 지나쳤다.


 점심시간의 휴식으로 자연스레 솟아나던 웃음과 활력은 얼마 걷지 않아 힘을 내서 웃어야 하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어깨가 뾰족한 돌로 찌르듯 아파서 도대체 가방에 무엇을 담고 다니길래 이렇게 무거운지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온 무게를 지탱하면서 욱신거리는 발바닥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건넸다.

 그래도 할만했다.

 나는 어느 것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든 최선을 다할 만한 어떤 것을 찾으면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것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여행도 마치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별안간 마음에 뜨거운 오기가 솟구쳤다.

 여행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고난을 자청해서라도 온 힘을 다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걷는 것으로 내 여행의 최선을 다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고,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싶고, 무섭고, 울음이 나올지라도 내가 이 다리로 최선을 다해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나에게 말하고 싶다. 

 도보여행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였다.


 걷는 중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찾아왔다. 

 내 어린날의 편린들이 다시 잊힐까 두려워 메모장에 적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적었다. 

 붙잡지 않은 상념은 이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여행 중 배웠다.

 걷고, 걸으며 생각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아트라니 숙소에 도착해서 벨을 눌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도시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담벼락에 기대어 앉았다.

 잠시 후 머리에 푸른 헤어롤 두 개를 도깨비 뿔처럼 달고서 나타난 할머니께서  반겨주시며 문을 열어주셨다.
  영어를 전혀 못하셔서 이탈리아어와 손짓으로 숙소의 이것저것을 설명해주셨는데 어쩐지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어서 연신 알겠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이해를 못 했을까 봐 걱정되셨는지 남편분께 전화하셔서 바꿔주셨는데 할아버지께서도 영어를 못하셔서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내 표정에 할머니 본인께서도 상황을 아셨는지 웃으신다. 또 웃음이 났다.

 부산스러움과 푸근함이 정말 집에 온 것 같았다.
  나와 숙소 예약을 위해 에어비엔비 메시지를 주고받은 건 멀리에 사는 아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잘 정돈된 방이 보였다. 

 나무 바닥에 흰색 가구로 인테리어 된 방은 몹시 아늑했고, 반쯤 열린 창문에 걸린 커튼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는 모습이 바닷가 마을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닮아 좋았다.

 무너지듯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포지타노 숙소를 떠나 목적지 숙소에 가방을 내려두며 드디어 하루의 도보여행이 마무리됐다.

 ‘해냈구나’ 목적지에 도착한 성취감과 안도감, 하루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왠지 모르게 유쾌해서 웃음이 나왔다.

 걷는다는 것은 정말 훌륭하다. 

 걸어온 모든 길을 내가 통과했다는 느낌이 여실히 든다.

 이것은 이동 속도 때문이 아니다. 

 오롯이 내 신체와 의지로 성취한 것이다. 

 도심에 살면서 좁아진 도보 이동 거리가 19km까지 확장됐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망원동에서 강남역까지 16.9km는 걸을 엄두를 내본 적이 없다.

 교통수단이 없어도 이 두발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여과 없이 다가온다.

 힘들어서 땅만 보고 걸을 때도 있었고, 기분이 처지기 싫어서 억지 미소를 지으며 걸을 때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잘 걸어주었다.

 내 체력과 의지에도 감사하다.


 아트라니는 아말피 옆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다.

 해안의 아름다움은 다른 아말피 해안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도시 외관은 다른 곳과 조금 다르다.

 해변으로 향하는 굴다리가 성문처럼 도시 전면부를 감싸고 있고, 그 안쪽으로 넓은 공터가 있다. 

 공터를 둘러싸고 도시가 형성되어 마치 요새와 같다.

 포지타노에서 살레르노로 차를 타고 지나간다면 아트라니의 진면모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털레털레 중심가로 향하는데 행사가 진행되는지 군중들이 모여있었다.

 중심을 둘러싼 식당가의 주인들도 모두 행사를 지켜보고 있어서 밥을 먹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군중 틈에 서서 행사를 지켜봤다.

 옛 결혼식을 재현하는 듯했는데 모든 과정이 온전한 축복 속에 있어서 보기 좋았다.

 광장을 원형으로 둘러싼 사람들은 계단 위, 기둥 뒤, 지붕 위, 다리 위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이 결혼을 축하했다.

 도시의 요새 같은 형태가 소리를 모으니 노래와 진행자 목소리와 군중들의 축하 함성이 도시 안쪽으로 울려 더없이 성스러웠다. 

 온 도시 사람들의 축제다.

 행사가 끝나자 그 자리는 빠르게 식당으로 변했고 그중 한 곳에 앉아서 리소토를 먹었다.

 종일 움직이니 대사량은 늘고 적당한 양에 만족해야 하는 가난한 배낭 여행자는 늘 배가 고프다.

 밥을 먹는 동안 금세 사방이 어두워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벼락에 앉은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다가 작은 과일가게에서 수박과 청포도를 샀다.

 하루 내 참아온 갈증을 분풀이하듯 과일을 먹고 청포도 중 절반은 다음날 도보 여행 간식으로 남겼다.

 여행은 준비의 연속이어서 오늘의 여행이 끝나면 내일의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

 옷을 벗어서 손빨래부터 하고 도보 경로와 거리, 숙소를 차례로 확인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6km 더 걸어야 하는데 걷는 것보다 날씨가 더 걱정이다.

 새벽부터 비가 온다고 예보됐다. 

 어쩐지 바람이 불고 달은 구름에 가렸다.

 배낭도 걱정이고, 우비가 없어서 우산을 써야 하는 것도 걱정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가 좁아서 간신히 라인에 붙어서 걸어왔는데 우산을 펼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등산과도 같은 대안 경로가 있지만 이 무게를 짊어지고 그 길을 갈 자신은 없다.

 해안에 붙어서 가는 것이 가야 할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기도 편하다.

 상태가 좋지 않은 핸드폰은 내일 가방에서 꺼내지 않을 생각이다. 

 아직 기능을 하는 것이 너무 감사하지만 보조 배터리를 이용하지 않으면 금세 방전되는 탓에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꺼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시계와 나침반 그리고 지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진정한 모험가가 될 수 있을까.


 내일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몸이 잠겼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오늘의 여정이 꽤 길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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