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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진심

 자꾸 샛길로 빠지는 내 탓일까,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길로 가다 보면 연거푸 자리를 맴돌거나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표지판을 살피며 운전을 하게 됐다.

 핸드폰으로 방향을 참고할 때도 있었는데, GPS와 관련된 무엇이 고장 났는지 현재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아서 동서남북 방향 정도만 참고했다.

 남쪽으로 가고 있으면 됐다.

 그마저도 의심이 들 때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내비게이션이 차량에 탑재되기 전엔 모두들 이렇게 길을 찾아갔다.

 작은 마을 샛길로 진입해서 큰 나무 아래서 쉴 때도 있었고, 논밭을 가로지를 때도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신경 쓰지 않고 길을 갈 뿐인데도 그 작은 자유로움이 좋았다.


 적막이 필요한 순간을 제외하고 상시 라디오를 켜 뒀는데 13일째 유럽 Top 20곡 순위 변동이 없는 듯했다.

 매번 같은 노래를 듣다 보니 대부분의 곡이 입에 익어서 어렴풋이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들리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었기에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니었고, 의미도 없었다.

 영어를 듣고 영어로 말하는 게 익숙해졌는데도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인지 팝송은 그 가사가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한참 흥얼거리다 보니 이 노래들도 노르웨이 여행의 일부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틈틈이 녹음을 했다.

 나중에 이 노래들을 들으면 여행의 전부가 기억날 것 같았다.

 이런 생각으로 녹음한 노래녹음한  생각어딘가의 소리들은 모두 망가진 아이폰에 잠들어있다.


 Alesund를 떠나면서부터 카메라는 가방에 넣고 꺼내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자꾸 사진에 담으려는 욕심이 생겨서 그것 마저도 접어두고 오직 이 시간을 눈과 마음에 담기 위함이다.

 여행 중 사진을 찍기 위해 움직인 적도 있었는데 베르겐으로 가기 전 폭포(Vøringsfossen)에 갔을 때가 그렇다.

 이쪽저쪽으로 이동하면서 시야마다 달라지는 전체 모습을 담으려고 고군분투하다가,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을 마주한 난간에 앉아서 하염없이 폭포를 바라보는 한 사람을 보고 약간의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보다 그 순간을 더 잘 보낼 순 없을 것 같았다.

 사진을 찍는 것도 장소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때 내 마음에는 사진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딱히 목적이 없는 촬영이었다.

 그 장소는 좁은 화각으로 눈에 보이는 만큼 아름다움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가나 호수, 숲, 폭포, 평지의 밭 등의 장소에 멈출 때마다 책 <노르웨이의 숲>을 꺼내어 읽었다.

 책을 읽을 때면 공감 가는 대목을 메모하면서 읽었는데 이 책의 많은 것이 집약된 후반부에 갈수록 메모를 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여행이 후반부에 갈수록 여행 과정과 장소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는 것처럼 기묘하게 책과 여행이 닮았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눈과 마음이 바쁘던 처음 몇 날보다 분명 뭔가 함축된 것이 마음에 들어온 건 여행을 마무리하는 2-3일간이었다.

 이때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썼다. 다만 여행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장소가 중심이 된 메모가 아니라 그때그때 떠오르는 상념을 기록하다 보니 대다수가 쓰임새 없는 파편으로만 떠돌았다.




 오슬로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도시인 Lillehammer에 머물렀다.

 베르겐이나 올레순처럼 알려진 도시를 제외하고 좌측 피오르드 경로에 있던 대부분의 소도시들은 사람이 거주하는 마을보다 여행자들의 쉼터 같은 느낌이 컸는데, 명소가 없는 우측 편의 소도시들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느낌이 강하게 났다.

 장을 보는 사람들, 플리마켓을 여는 사람들, 유모차를 몰고 대화하는 사람들,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어린애들을 볼 수 있었다.

 가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고, 오슬로까지 고작 1시간 40분 정도의 거리에서 쉽게 출발하지 못했다.

 아쉬움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더 이곳에 있고 싶고, 더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운전 계기판에 찍힌 이동거리는 어느새 3000km에 가까워졌다.

 오슬로의 호스텔, 오슬로를 떠나면서 마주한 자연, 첫날 10시간이 넘는 이동부터 다양한 트레킹과 중소 도시들, 내셔널 루트, 아침저녁으로 차리던 간소한 식사와 놀라운 자연환경, 자연을 앞에 두고 토해낸 감정들이 놀라울 정도로 또렷했다.


 오슬로 공항에서 차량을 수령하고 반납하기 때문에 한번 더 오슬로에서 숙박할 필요는 없었다.

 차량을 반납하고 덴마크로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면서도 노르웨이의 자연 속에 있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Alesund에서 방향을 바꾼 뒤부터 며칠간 노르웨이 여행을 갈무리하면서 더욱 강하게 결속된 느낌이었다.

 책 <노르웨이의 숲>을 손에 쥐고, wifi를 연결해서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들을 들었다.

 정말 무엇하나 빠짐없이 경이로운 순간들이었다. 세계여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와타나베,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지?"

 "모르겠는데요."

 "너무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나 혼자 덩그러니 이런 곳에 내팽개쳐졌으니 말이야." 하고 레이코 씨는 말했다.

 "하지만 '미칠 것만 같다'는 게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나오코와 함께 요양시설에 있던 레이코 씨는 그곳에서 8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새로운 세상이다. 새로운 삶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곳으로부터 나온 것은 본인이다.

 모든 감각의 자극으로부터 떨면서도 멋지게 받아들일 차례다. 나도 그렇다.




 "저기, 왜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다시 한번 묻는 거지만."

 "아마 이 세상에 아직 잘 적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쩐지 이곳이 현실 세계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사람들도, 풍경도, 어쩐지 현실같이 안 보인단 말이야."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나는 노르웨이 편 <노르웨이의 문장들>을 쓰면서 정말 행복했다.

 노르웨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며칠 만에 글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로 느껴졌다.

 당시에 적은 수많은 글들과 사진, 노래, 영상을 참고하면서 글을 썼는데 그때도 <노르웨이의 숲>이 여행을 관통하는 감정의 통로였고, 이번에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 여행이라는 껍데기를 빌려서 내 이야기를 꺼내었고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통로로 <노르웨이의 숲>을 활용한 것이다.

 글은 서툴고 부족하지만 많은 진심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내용 중 태반이 그 이야기였는데 나는 이 글에 사랑과 관련된 것은 모두 제외하고 언급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청춘의 한때에 조금 더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굳이 내 예전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최대한 진실한 감정과 생각을 꺼내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행을 하던 날, 메모를 쓸 때만큼의 선명한 감정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것은 잡을 수 없다.


 책 <노르웨이의 숲>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바로 앞장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훔쳐보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시선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 있었고,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책 <노르웨이의 숲>을 빌린 마지막 이야기다.


 135페이지

 어느 날 담당 의사에게 그 말을 했더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옳다고 했어. 그는 우리들이 이곳에 와 있는 건, 그 비뚤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진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어. 우리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 비뚤어진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는 거야.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버릇이 있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사고방식, 사물에 대한 견해에도 버릇이 있고, 그것은 고치려 해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이 아니며, 무리하게 고치려들면 다른 데가 이상해져 버린다는 거야. 물론 이건 지극히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 건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말하려는 뜻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 것도 같아."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136페이지

 바로 그 점이 이곳이 바깥 세계와 전혀 다른 점이야. 바깥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비뚤어진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거든. 하지만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뚤어짐이야말로 전제 조건이지. 우리는 인디언이 머리에 자신의 부족을 나타내는 깃털을 꽂고 있듯이, 비뚤어짐을 몸에 달고 있어. 그리고 서로가 다치치 않도록 조용히 살고 있는 거야.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218페이지

 "환자와 스태프를 전부 바꿔치기해도 좋을 정도군요." 하고 나는 놀라서 말했다.

 "정말 그 말이 맞아." 하고 레이코 씨는 포크를 살살 흔들면서 말했다.

 "와타나베 군도 점점 세상 이치를 깨달아가는 것 같네."

 "그런 것 같은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정상이라는 점은” 하고 레이코 씨가 말했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지”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중앙대학교에서 2년 동안 주말을 투자하여 상담심리학을 배웠다.

 4년에 걸쳐 지식을 쌓은 사람들과 석박사들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모르지만 나름 진지한 배움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온 모두가 그랬다.

 오히려 필요할 때, 원해서 배우는 것이었기에 많은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내가 스물여섯 살 이월에 정보통신공학을 전공한 대학을 졸업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4년 동안 배운 지식은 마음만 먹으면 1년이면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우선이다.


 상담을 배우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동기가 있었는데, 그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픔이 있었고 자신이 힘들었기 때문에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스무 살 대학생과의 차이인 듯했다.

 뒤늦게 배움을 시작한 동기가 자신의 아픔인 것이다.

 가족 혹은 타인으로 기인한 아픔은 그들 삶에 아픔이었고 애환이었고 한이었다.

 나는 그 2년간의 수업이 사실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는데 더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아픔이 있어서 온 사람은 아니었다.

 내 청춘의 발버둥을 치는 과정이었고, 언젠가든 사람을 돕는 무언가를 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기준에서 가진 힘과 시간은 늘 남아돌았고 뭐든 좋으니 내 에너지를 쏟고 싶기도 했다.

 그 밖의 많은 이유로 상담심리학을 배우면서 세상에 참 다양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휴가 나온 군인의 눈에 다른 군인이 유독 많이 보이는 것처럼 상담과 심리 부분에 관심을 갖자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됐다.

 그들 중 이상행동과 장애를 가져오는 현상을 제외하면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이란 병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구분할 수 없는 듯했다.

 섬세한 감정으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편안하고 진솔했다.

 저마다 일종의 가면을 쓰고 대화하는 세상 사람들의 대화가 주는 허무함보다 가득한 진심이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마치고 다시 일상을 살다 보면 혼란스러웠다.

 마치 마음에 병이 없다고 여기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음에 병이 있어서 요양 시설에 들어가 있는 나오코와 레이코 씨를 떠올리며 어느 쪽이 정상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와타나베의 마음과 같았다.


 나는 어떤가, 나는 청춘이란 열병을 몇 년째 앓고 있다.

 나 역시 어떤 삐뚤어짐을 몸에 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나도, 아빠도, 엄마도, 그 외 세상 사람들도 모두 비뚤어짐을 몸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다.

 배운 지식은 상담실이란 공간보다 그 외의 공간, 길 위, 민박, 사무실, 공공장소, 공동체 공간 등에서 사용됐다.

 내 가족과 나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공감하는데 더 많이 활용됐다.

 여전히 미숙하지만 늘 노력하고 있는 사항은 앞선 글의 시작에서 레이코 씨가 말한 것과 같다.


 "우선 첫 번째로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자기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것. 둘째는 정직할 것, 거짓말을 하거나 꾸며대거나, 사정이 좋다고 얼버무리지 말 것. 그러면 되는 거야."


 삐뚤어진 나는 삐뚤어져 있기에 정상인 세상을 살면서 누구든 도울 준비가 돼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늘 정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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