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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기억의 홍수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이 이런 작용을 돕는 듯했다

 언젠가 한 번은 몸살감기에 걸렸다. 아주 어릴 때다.

 약을 먹고 누워서 곤히 잠든 사이 굉장히 많은 땀을 흘렸다.

 얼마나 잤을까 더위에 뒤척이며 눈을 떴을 땐 옷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욱신거리던 몸이 몹시 가뿐하고 열도 나지 않았다.

 아팠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만 같아서 앉은 채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털고 일어났다.

 엄마는 장을 보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창밖에 해가 지고 있었고 모든 사물이 모호하고 몽롱했다.


 노르웨이 바이킹 캠핑에서 잠든 밤, 새벽 네시에 온몸에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히터로 데운 방안이 몹시 뜨거웠다. 

 습도 유지를 위해 빨래와 젖은 수건 모두 방에 널어뒀기에 창문엔 수증기가 맺혔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앞다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몸이 매우 가볍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기에 히터를 끄고 창문만을 닫은 채 조금 더 잠을 청했다.

 다시 눈을 뜰 때까지 굉장한 숙면을 취했다.




 전날 258 도로에 비견할 만한 아름다운 곳에 가기 위해 아침을 서둘러 준비했다.

 재스민 쌀에 평소보다 물을 많이 넣어서 죽이라도 먹자는 심경으로 휘저으며 계속 끓였는데 지금까지 먹은 쌀밥 중에 제일 괜찮았다. 

 '날리는 쌀'이라고도 표현하는 재스민 쌀로 내가 생각하는 식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물을 붓고 끓여야 했나 보다. 

 끓이는 동안 참기름이라도 있다면 한 바퀴 둘러서 고소함을 주고 싶었다. 


 서울에 오랫동안 자취하면서 죽을 끓여야 할 때가 있었다. 

 죽에는 종류가 참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재료를 넣지 않고 흰 쌀로만 만든 것을 최고로 친다. 

 씻은 쌀을 참기름을 둘러서 가볍게 볶고, 한 컵 정도 물을 부어서 끓이며 뒤섞어준 뒤에야 넉넉한 물을 넣어 끓이며 저어준다. 참기름을 더 넣어도 좋다. 

 전날 밤에 미리 쌀을 씻어서 불려놓고 자면 부드러운 죽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데 불려놓지 못해도 오래 끓이면 괜찮다. 

 씹히는 것이 없는 죽을 만들 때는 불린 쌀을 믹서기에 한번 갈아서 조리를 시작하면 쉽다. 

 이 경우 쌀이 부서진 정도에 따라 정말 씹힘 없이 묽다. 

 소금이나 간장을 넣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리 중에 가미하기보단 다 만든 죽을 먹을 때 각자 비법으로 만든 양념장이나 간장, 반찬과 곁들이는 게 좋다.


 가방에서 고추 참치캔 하나를 꺼내서 흰쌀밥과 참치 만으로 풍족한 아침 한 끼를 즐겼다. 

 참치캔 안에 남은 양념과 부스러기가 아까워서 남은 밥을 캔 안에 채워서 비벼보니 충분히 맛있는 참치캔 밥이 만들어졌다. 

 네 스푼이 들어갔다. 뚜껑을 그대로 위에 덮어서 점심 도시락으로 삼았다

 전날처럼 저녁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식사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훌륭한 대안이었다.


 머리카락이 길던 때의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한 그저 아주 평범한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봄을 맞아 바깥세상으로 막 뛰어나온 작은 동물처럼 싱그러운 생명감을 온몸으로부터 뿜어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독립된 생명체처럼 즐겁게 요동치고 웃고 화내다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기발랄한 표정을 본 것이 무척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감탄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채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여행 중의 나는 싱그러운 생명감을 내뿜고 있었다.




 캠핑장을 떠난 직후부터 많은 비가 왔다. 

 비 올 때는 더욱 독서에 집중하기 좋아서 경치가 괜찮은 곳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전날 읽던 부분을 이어서 읽었다.  

 이곳에서 기상을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비는 곧 멈출 것이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동안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 날씨 변화가 있었다.

 Geiranger 쪽으로 이동 중에 비가 멈추고 해가 떴다. 


 Geiranger는 피오르드(Geirangerfjorden) 시작점에 있는 마을이다. 

 15번 길을 따라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우측 63번 길을 따라가야 Geiranger까지 갈 수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Dalsnibba 산 전망대에서 Geiranger 쪽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대단하다

 이 63번 길 또한 내셔널 투어리스트 루트에 속한다.

 길은 양쪽에 산맥을 두고 협곡을 달리는 것과 같았다. 

 지대가 높아서 해수면이 이곳까지 차오르지 않았지만 아마 빙하가 만든 협곡일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곳을 지나가는 것은 물이 빠진 피오르드 밑바닥을 드라이브하는 것과 같다. 

 지나는 모든 길이 아름답지만 장소마다 그 아름다움이 달라서 천혜의 자연이 만든 신비를 보러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노르웨이를 찾아올 수밖에 없나 보다.


 노르웨이 여행 3일 차에 비포장 된 산길을 간 적이 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으로 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 

 도심형 해치백 골프 차량으로 가당치도 않은 길이었다. 

 처음에는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생각보다 관리가 안된 산길이란 의구심으로 변했고, 더 올라가다간 뒤로 넘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경사에서 차를 멈췄다. 

 길이 아니구나. 그때 깨달았다.

 뒤로 되돌아 가보려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자마자 차가 뒤로 미끌리며 좌측으로 회전했다. 

 기겁하며 핸들을 틀어 앞으로 전진하여 고정하고 탄식했다. 

 처음 의구심을 가졌을 때 길을 살폈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 길을 올라와서 정상적인 도로에 도착했을 땐 차의 절반이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식은땀으로 손과 등이 축축했다.


 63번 길을 가는 중에 산비탈을 타고 흐른 물이 고여 호수가 만들어진 벌판에 차를 세우고, 잠시 쉬는 동안 여전히 지저분한 차를 봤다. 

 비가 그렇게 많이 왔는데도 씻기지 않은 것은 모두 그날 진흙이 남긴 흔적이다. 

 차에서 수건을 꺼내서 조심히 털어내고 물을 뿌려 닦았다. 




 오랫동안 나는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서, 그 당시의 일을 잇따라 떠올리고 있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방에 누워 있자니, 여태껏 그다지 떠오르지 않던 옛날 일과 정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즐거웠고, 또 어떤 기억은 조금 슬펐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동안 계속해서 잠들어있던 기억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정신없이 기억을 붙잡고 꼬리를 물다 보면 나중에는 옮겨 적으래야 적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버려서 아주 일부만 되새겨 기록할 수 있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자유로움 때문일까, 다양한 자극 때문일까, 과거의 단편과 비슷한 무언가가 스쳐갔기 때문일까.  

 기억을 기록하다 보면 새로이 생각나는 것들이 있어서 메모하던 핸드폰을 넣고 맥북을 꺼내어 바삐 타자를 쳤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이 이런 작용을 돕는 듯했다.


 목표로 했던 Trollstigen, 요정의 길이 있는 곳에 도착할 때쯤부터 많은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했다. 

 그대로 지나쳐서 예약한 숙소로 이동했다. 

 Alesund Airport Hotel.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별관에 있는 싱글룸은 단층 벙커 형태로 독특한데 방안에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고 창문 밖에 혼자만의 작은 테라스가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바닷가 방파제에 차를 세우고 앉아서 한참 동안 바다를 봤다. 

 나는 바닷가에 태어나지 않아서 바다를 책으로 읽고 텔레비전에서 보고 라디오로 들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처음 바다를 보기 전까지 내게 바다란 미지의 세계였다. 

 동순천 다리 밑에 흐르는 강이 내게는 바다에 가까웠으나 사람들은 바다란 끝도 없이 넓고 깊다고 했다. 

 기억 속에서 여수에 있는 이모집에 놀러 갔을 때 다 같이 오동도에 가면서 본 바다가 내게는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간 바다가 있었을 진 모르겠으나 해수욕장의 모래사장과 물놀이가 아니라 바다라는 존재의 인식은 내 머릿속에 그렇다. 

 파아란 바다와 파도, 갈매기 소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바다 냄새. 모두 낯선 것이었다. 

 여수 바다에 엄마 손에 끌려가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그 바다를 찾아갔을 것이다. 

 늘 바다를 보면 마음이 좋다.




 밤 열한 시에 청량리 역에서 기차를 탔다. 

 술을 마시고 피시방에서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가 "지리산에 갈래?"라는 형들 말에 가자고 답했다. 

 유훈이 형, 덕수 형, 건이, 진우와 나 이렇게 다섯 명이서 그날 아침에 헤어져서 저녁에 다시 만났다. 

 지리산 노고단을 올라간다는 형들 복장이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고 우리 또한 평소와 다름없었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야간 기차가 구례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입석 칸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떠들며 게임을 하다가 도착 직전에서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는 기차 칸에서 떠들썩한 것이 흔히 보는 풍경이었다. 

 게임의 벌칙으로 다음칸에 들어가서 승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물구나무를 서고 팔 굽혀 펴기를 해도 모두 그것에 박장대소하며 웃고 손뼉 칠 뿐이었다. 


 깜깜한 새벽에 구례역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님이 소개해준 민박에 짐을 풀고서 바로 노고단으로 가는 산 입구로 향했다.

 등산 입구에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전문 장비를 착용하고 등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고 총각들 후레쉬는 있소?' 없었다. '뭐 먹을 거는 있고?' 등산 후에 먹을 생각으로 민박에 두고 왔다. 조심해서 우리 뒤에 따라오라는 말에 우리는 멋쩍게 웃으며 산을 올랐다. 

 모든 게 즐겁기만 했다. 

 동이 트면서 드러난 산길엔 곳곳에 눈이 녹지 않았고, 계곡에는 대형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고드름을 따서 갈증을 채우고, 칼싸움을 하고, 경쟁하듯 망가진 사진을 찍으며 쉴 틈 없이 웃었다. 

 얇은 옷을 입고도 추운지 몰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무모했지만 누구 하나 등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정상에서 내려와서 숙소 평상에 앉아 김밥을 먹을 때는 우리 발에서 나는 발 냄새 때문에 김밥이 상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또 한참을 웃으며 허겁지겁 먹고 잠들었다. 

 광양 산수유 축제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게 즉흥적이었고 근심 걱정이 없었다. 

 순간을 더 즐기는 것에만 충실했다.




 다음날 Trollstigen을 충분히 즐기는 동안에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땐 전망대 쪽에 있는 휴게소에서 편안하게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연속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했고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앉아있었다

 다음 경로를 고민하던 중 아름다운 도시 Alesund에서 낭만적인 하루를 더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하곤,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시내 숙박을 예약했다. 

 예정돼있는 경로를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셈이다.  

 Alesund는 1900년대 초반에 대규모 화재로 대부분의 주택이 소실된 이후 아르누보 양식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소규모 도시의 전체 건물이 이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느 골목에 들어서도 눈이 즐거웠고, 언덕 위에서 도시 전체를 눈에 담을 때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이 도시의 전경 사진을 찍어 지인들에게 공유했을 때 포토샵으로 보정했는지 질문을 많이 받았다. 

 도시의 건물 형태뿐만 아니라 색감이 대단히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건물 양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Alesund에 도착할 무렵에는 보슬보슬 비가 왔다. 

 오래된 호텔에 차를 세우고,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우산을 쓰고 나왔는데 과거 어딘가를 거니는 느낌이어서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처럼 시야가 어지러웠다. 

 아주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펍들만 문을 열고 있었고 재즈가 흘러나오는 오래된 펍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몸속의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를 메워줄 것도 없는 채, 그것은 순수한 공동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몸은 부자연스럽게 가벼웠고, 소리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나는 평일에는 이전보다 더 충실하게 대학에 다니고 강의에 출석했다. 강의는 지루하고 같은 과 녀석들과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교실 맨 앞줄에 앉아서 강의를 듣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서 식사를 했고, 담배 피우는 것을 그만뒀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내 하루가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면 더욱 현실에 집중했다. 

 매일 여섯 시에 일어나서 누구보다 빠르게 회사에 갔고, 궁금해하지 않는 이유를 확인하고, 이유도 모른 채 수행하는 업무 방법은 변경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조직문화를 스스로 공부해서 계획하고 제안했다. 주말에는 상담심리학을 배우러 학교에 갔다. 

 하루는 바쁘게 돌아갔다. 다만 지인들과의 약속은 서서히 줄여나갔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면의 갈증과 속삭임에 귀 기울이기 위해. 이게 내 청춘의 일부 과정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고민 끝에 청춘의 발버둥을 치는 중에 한 방법으로 세계여행을 선택했다. 

 기존의 삶을 멈출 필요성을 느꼈고, 어떻게 살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 볼 기회가 필요했다. 

 여행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여행이 연속되는 세계여행에 특별함이 있다고 믿었다. 

 기존의 삶을 멈추고 '나'와 세상을 탐구한다면 세계여행이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불안하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시간이 무의미 한건 아닌지 불안하다.

 하지만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발버둥을 통해 내가 올바른 길을 향해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정말이지 굳게 믿고 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많은 것이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길 위에서 많이 울었다. 나 자신에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약한 소리가 마음에서 새어 나올라 치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라며 악을 써댔다.

 그래 나는 이제 노르웨이 대자연을 향해 고함치고 악을 써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수그려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데 그게 내가 나로서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는 아니라고 발버둥 쳤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도, 세상 사는 게 그렇다는 말도, 남들처럼, 되는대로, 편하게 이 모든 말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깨져라, 내 마음을 둘러싼 막이 깨지거나 나를 둘러싼 세상이란 벽이 깨지거나 둘 중에 하나가 깨져라. 하고 바랬다. 

 나는 지지 않겠다고 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낙망하는 건 상관없지만, 적어도 타인의 가치관에 무너지지 않겠다. 부자가 되지 않아도, 물질이 가난한 삶이어도, 타인에 비해 많은 것이 느려도 괜찮다. 나의 다음을 내가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괜찮다고 다독였다.

 이런 나의 갈망이 혹여나 틀린 것이면 어쩌나. 대체 먹고 자는 것이 전부인 이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모아둔 돈과 내 청춘의 시간이 타국의 길 위에 뿌려지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의문이 고개를 쳐들어도 그때의 내가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선택했음을 믿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가 싫어서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다. 부정하고 싶은 과거는 하나도 없다. 언제나 나는 최선을 다해서 고민하고 결정했고, 그 선택이 모두 좋다. 정말 사랑스러운 날들이었다. 

 이제 때가 됐을 뿐이다.


 조급해선 안된다. 천천히, 하나씩.


"제일 중요한 것은 말이야, 초조해하지 않는 거야." 하고 레이코 씨는 내게 말했다. "이게 내 또 하나의 충고야. 초조해하지 말 것.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일이 얽히고설켜 있어도, 절망에 빠지거나 조바심이 나서 무리하게 서두르면 안 돼.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서서히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할 수 있겠어?"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실제로 세계여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적합했다. 

 세계여행은 그 시작과 근본이 나의 일상, 나의 거주지로부터 떠나는 것에 있어서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이미 많은 실타래를 끊어내고 시작한다. 

 불필요한 것들이 단번에 끊어져버리니 풀어야 할 마음의 실타래도 단순해진다. 

 서울에 거주하는 동안엔 나의 꼬인 실타래를 푸는 것보다 새로운 실이 엉키는 게 늘 빨랐다.

 그리고 이 여행은 내가 기존에 살아보지 못한 여행자의 삶을 살아볼 기회였으며, 내가 겪어보지 못한 타 국가의 문화를 겪어볼 기회였다. 

 나라는 사람의 세상은 내가 맺는 인간관계와 내가 겪은 것들, 내가 아는 것들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세계가 이 여행 동안 계속 확장된다.

 그러니까 세계여행도 그냥 생각 없이 이동하기보다 여기에서는 어디를 가볼까 궁리하고 무엇을 할지, 어떻게 여행할지 고민해야 더 풍부해진다. 

 타인이 정해둔 길을 따라가는 것도 좋고, 타인이 가지 않은 곳을 가는 곳도 좋다. 

 모든 게 나한테 집중되어있으면 가장 좋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 외에는 여러 글에 나눠 이야기하고 있으니 재차 언급할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여행도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나는 모든 활동에서 가장 그 활동을 잘하는 것, 그 활동을 이들 중 진정한 승자는 그 경험 자체에 푹 빠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게이치 않고, 누군가 미련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그곳에 진정성 있게 쏟아내는 사람들이 늘 승자였다. 

 사랑도 그렇다. 누가 더 덜 좋아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랑을 할 때 온전히 사랑에 마음을 쏟은 쪽이 늘 승자다. 

 쏟아지는 마음을 받기만 한쪽은 마음 우쭐해할 필요가 없다. 

 헤어질 때 패자로써 초라해질 테니까. 

 그러니까 여행도 여행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고 몸과 마음을 쏟아버리는 쪽이 제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이번 여행은 어떻게 하지? 이렇게 여행하는 것이 맞나? 이 여행을 왜 시작했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되새기고 고민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 있다.

 그래서 타인의 이목을 신경 쓰거나 타인에게 자랑할 틈이 없다. 

 나에게 자랑이면 그게 스스로에게 최고의 칭찬이고 위안이다. 

 이를 위해 SNS를 멀리하고 있으나 SNS가 얼마나 강한 유혹을 갖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북유럽으로 넘어오면서 USIM칩을 구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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