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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거울속의 나는 싱그러운 생명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환점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돕는다는 거야. 누구나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서로 도우려고 해. 다른 곳에선 그렇지가 앉지. 유감스럽게도. 다른 곳에선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이고,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일 뿐이야. 환자는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거야. 그렇지만 여기는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 우린 서로의 거울이고, 의사도 우리 동료인 거지. 곁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가 뭔가 필요하구나, 하고 느끼면 어느새 다가와서 도와주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그들을 돕기도 해. 그 말은, 경우에 따라선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거야."

 "당신도 여기에 있는 동안은 우리의 동료니까 나는 당신을 도와주고, 당신도 나를 도와주는 거지." 레이코 씨는 온 얼굴의 주름을 부드럽게 펴면서 웃었다. "당신은 나오코를 도와주고, 나오코는 당신을 돕는 것이고."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구체적으로?"

 "우선 첫 번째로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자기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것. 둘째는 정직할 것, 거짓말을 하거나 꾸며대거나, 사정이 좋다고 얼버무리지 말 것. 그러면 되는 거야."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나는 줄곧 누군가에게 도움 요청하는 것을 잘 못하고 살아왔다.

 도움이 필요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손을 내미는 것이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혼자 하면 될 것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120여 년 전에 불탄 도시를 재건했다는 이야기가 이 도시(Alesund)를 특별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을을 거닐다가 들어간 카페 겸 박물관에서 마을의 역사에 대한 영상과 책자를 봤다. 

 모든 게 너무나 빠르게 바뀌는 서울에 살다 온 나로서는 그때 지은 건물들이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것이 더 놀랍고 특별하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내부를 리모델링해서 현대식으로 바꿨지만 도시 외관은 철저하게 보존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어딘가를 들어가지 않고 마을을 거니는 것이 좋았다. 

 다리 옆에 있는 푸드 트럭에서 피시 앤 칩스를 사서 야외 밴치에 걸터앉아 먹었다. 


 다리 위에서 건물 사이로 찰랑이는 물을 보고 있으면 도시 안으로 강이 흐르는 느낌이지만 바닷물이다. 

 도시 전체를 바다가 감싸고 있다. 

 노르웨이에는 큰 파도나 해일이 없는 걸까. 이 아름다운 건물로 이뤄진 도시는 건물이 모두 해수면에 맞닿아있다. 

 여지를 두지 않고 지형 끝선에 맞춰서 건물이 빼곡하다. 


 지난밤 일정을 변경해서 이곳 Alesund로 되돌아오면서 다음 이동장소였던 atlanterhavsveien를 계획에서 제외했다. 

 atlanterhavsveien 아주 작은 섬과 섬을 잇는 8.3km 해양 도로이고, 네셔널 투어리스트 루트 중 하나다.

 운전 중 내심 기대했던 길 중 하나였다.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면 atlanterhavsveien를 지나 트론헤임까지 갈 수 있지만 여기서 더 위로 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언젠가 방문할 다음의 몫으로 미뤄두고 이제는 위로 향하던 경로를 꺾을 시간이다. 

 남은 여정은 욕심을 내기보다 최대한 갈무리하면서 오슬로 쪽으로 돌아가고 싶다. 

 차량 반납을 위해 3일 뒤에 오슬로에 도착해야 한다. 

 이제 다음 나라로 이동할 시간이다.


 인생에도 이렇게 경로를 꺾는 지점'들'이 있다. 

 전환점, 반환점, 분기점, 변곡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불렀다. 

 진정한 의미의 전환점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스무 살에는 분명 군대가 어떤 전환점 같았다. 

 전환점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교차점이자 또 다른 시작점 말이다. 

 군대는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세계여행보다 더 진기한 경험이었지만 누구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과도 같았다. 

 세상과의 완벽한 단절의 시간. 그래 그런 시간이었다. 

 이렇게 뒤늦게 미뤄둔 답을 찾아 헤멜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다면 군대를 미루고 미뤄서 서른 직전에나 갔으면 좋을 뻔했다.


 신입생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부터 친구 놈들이 하나 둘 군대로 갔다. 

 스물에서 스물하나, 늦어도 스물둘에 군대에 가는 것은 대다수 남자들에게 정해진 수순과도 같았다.

 더 늦게 갈 수 있음에도 대다수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각자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1학년을 마치고 가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황금 같은 신입생 시기는 일단 누려야 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한 수능이 이제 막 끝난 자유의 첫해이고, 인생에 딱 한 번뿐인 신입생 아닌가? 그렇다고 더 늦으면 안 될 듯했다. 

 더 늙어서 복학하면 남은 대학 생활은 누구와 무슨 즐거움으로 한단 말인가. 

 언젠가 군대를 가야 할 사람과 누가 연애를 하고, 진로는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런 계산이 그 당시 나의 판단이었고, 내 친구들의 판단이었고, 많은 주변인들의 공감 사항이었다. 

 공부는 선택에 중심이 되진 않았다. 공부 따위야 언제 배우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군입대 전까지 시간은 참 덧없고 허무했다.  

 시간은 늘 소중했지만 그 시간을 활용하여 할 수 있는 것 중 대다수가 덧없게 느껴졌다. 

 입대 날짜를 받아두고는 특히 그랬다.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군대에 가버리면. 

 2학기 종강 후 삼삼오오 학교를 떠난 뒤 나도 모든 짐을 싸서 광주로 내려왔다. 

 이후 군대 가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으고 친구 놈들과 술 마시는 하루의 반복이었다. 

 학교에서는 정의할 수 없는 낭만이라도 있었는데 이 시기는 그저 굴러다니는 것과 같아서 많은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지금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흔하고, 영상을 만들고, Vlog를 찍고, 책을 쓰는 등 개인 활동의 다양성이 더 많아진 세상이지만 당시에는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런 시간이 있다고 하여 세계여행은 물론이고 해외여행조차 꿈꾸지 않았다. 

 2006년 지구엔 스마트폰이 없었고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없었고, 군대를 앞두고 헤어진 친구 놈들과 문자나 전화로 연락하던 시대였다.

 아무튼 군대는 이십 대의 한 점이었고, 가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시기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었기에 그 시기에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손에서 놔야 갈 수 있었다. 

 그게 그 시기 청춘의 시간이었지만.


 세계여행 중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만큼 각 나라와 도시에서 얼마나 머물러야 하는지 기간도 고민이다. 여행의 마무리 말이다.

 사람마다 시기마다 상황 따라 여행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적정 시간은 없다.

 지나가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도 있고 더 머물러서 후회된 적도 있었다.

 다만 그런 과정을 통해 전체를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어느 시점에서는 손을 놓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여행을 종료하는 것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과 닿아 있어서 지금 잡은 것을 놓아야 다음을 잡을 수 있다. 

 세계여행도 한국에서 잡고 있던 기회를 손에서 놓고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더 보고 싶은 것에 대한 욕심을 놓고 이전과 다름없는 템포로 오슬로로 돌아가는 길을 즐기고 여정을 갈무리하려 한다. 

 대부분의 명소가 좌측 경로에 몰려있기 때문에 우측 경로에서는 내 눈에 아름다운 곳이 명소가 됐다. 

 사람들이 찾는 유명 장소가 없을 뿐이지 아름답기는 매 마찬가지 었다.

 이런 아름다움은 잘 정비된 유료 도로를 이용하면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도로 여행하는 것과 고속도로로 여행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도로를 달리는 행위 이상을 가질 수 없다.

 나도 내비게이션만을 따라가면서 이런 점을 처음에 인지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국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측 편의 가장 큰 장점은 숲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자기 혼자서 처리해버리는 사람이었어. 누구에게 의논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 특별히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 건 아니야. 그저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 아마도. 그리고 부모님도 거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 애는 내버려 둬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난 뭐든 언니와 의논했고, 언니는 언니대로 아주 친절하게 많은 걸 내게 가르쳐줬지만 정작 자신의 문제는 누구에게도 의논을 한 적이 없었어. 혼자서 처리했지.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나도 그랬다. 혼자서 처리하는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난 힘들다는 말을 잘 안 한다. 도와달라는 말도 잘 안 한다. 두 개를 정말 지독하게도 안 한다.

 힘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왠지 다 납득돼버렸다.

 힘들다 싶다가도 그래 힘든 게 맞지 싶고, 도와달라고 말할까 싶다가도 뭐 이런 걸 가지고 도와달라고 하나 싶다. 버틸만한 것처럼 느낀다. 일도, 과제도, 인생의 여정도 모두.


 부모님은 늘 나를 믿어주셨다. 

 교육이나 진로에 관해 아버지는 과묵함으로 믿음을 전달했고, 어머니는 신앙으로 인도하심을 믿었다. 

 나는 그런 믿음 아래서 세상이 말하는 것을 듣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아이에게 세상이란 가족, 선생님, 친구들, 뉴스, 책 그 정도였는데 책을 제외하면 사회적 가치관이 한통속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하는 결정이 일반적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누구도 내 삶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분명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찾으려 노력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교육과정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적어도 국영수사과에 이런 탐색의 시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고 하는 자율학습은 수능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래서 의문을 뒤로 미뤄두면 교육과정 끝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이 학생들과 충분히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진로와 대학 선택을 돕는지 궁금했다.


 학생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시간이 다가오면서 이따금 나의 미래에 의문을 갖는 날이 있었다. 

 축구를 한 뒤 푸른 하늘을 볼 때, 자율 학습 중 라디오를 들을 때, 수능 제도가 바뀐다며 모두가 떠들썩할 때,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시내에서 영화 볼 때가 그랬다. 

 20대라거나 30대라거나 아주 먼 일인 것만 같았다. 

 특히 30대 이상의 미래는 딱히 생각해보지도 생각되지도 않았다. 

 진로나 적성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방법도 몰랐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일들이 있고, 어떻게 경험해볼 수 있는지, 어떤 것을 배워보면 좋을지에 대해 말이다. 

 먼저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몰랐고, 도움을 누구에게 어떻게 구해야 할지는 지금도 막막하다.

 내가 겪어오기론 그랬다.

 나는 그저 이런 것을 모르면서도 일단 안정적인 장치 정도는 만들어둘 생각으로 결정하고 움직였다. 

 이것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분명 중,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내신 성적과 수능 성적, 즉 입시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고, 공부하는 노력과 집중력, 끈기 등을 배우고 정의할 수 없는 뭔가를 잃었다.


 수업 중에 애들이 질문이 없다고 선생님들이 말한다.

 그런데 질문을 하려면 뭘 질문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방금 들은 내용을 스스로 파악하고 소화하면서 그다음에 발생한 궁금함을 질문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교 강의시간에 '질문 있나요? 없으면 넘어가겠습니다.' 이 말이 가장 답답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빠르고 질문하고 싶을 땐 이미 선생님이 없다.


 삶은 순탄하게 직진했다. 

 수능을 마치고, 서울의 대학교, 군대, 인턴, 졸업, 입사. 26살의 나는 어느 하나 시간을 흘리지 않고 정직하고 이상적인 경로에 서있는 젊은이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결혼하면 되겠다고 했다. 마치 내 삶의 여정은 여기서 머물면 되는 것처럼 말했다. 

 '나만' 내 삶에 다음이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찾는 무언가에 대해 여전히 갈망하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곳에 평생 있겠다고 했나 속으로 콧방귀 뀌면서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면 그쪽으로 가자.'


 엄마에게 처음 이런 생각을 내비쳤을 때, 그동안 나의 부모님이 내 삶의 방향에 대해 말없이 지지해줬던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다. 

 내 선택이 부모님이 또는 윗 세대가 생각한 박스에서 벗어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땐 축구선수도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른들은 이제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후로 참 많이 싸웠다. 

 '묵묵히 일하다 보면, 열심히 하다 보면, 기다리다 보면' 대체로 이런 말로 엄마는 나를 다독였고, 늘 그 말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다음을 찾지도 못했는데 부모님과 타인의 가치관을 듣다 보면 찾으려는 노력조차 꺾어야 하는 것 같아 의지가 약해졌다. 

 월급이 주는 중독성과 직장생활의 안정성에 현재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버텨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음을 찾는 노력이 먼저임에도 현재를 이겨내고 벗어나야 하는 것도 동시에 과제가 돼버렸다. 

 다음을 찾으면 과연 지금을 놓을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무거웠다. 현재를 놓는 게 더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다음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곳에서 욕심을 놓아야 하는 것처럼, 다른 것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만 함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어찌 됐건 타인과 주변 환경 어느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내 안의 용기와 노력, 선택, 결정, 고민 이런 것들의 문제였다. 

 나의 문제라는 결론에 닿으면, 대체 누구에게 이것을 도와달라고 할 것이며 누구에게 힘들다고 할 것인가. 결국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고,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람도 나였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사람도 나였다.

 외로웠고, 외롭기 때문에 늘 사람들 틈에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후로 매 해마다 인간관계가 늘어만 갔다.

 사람들의 고민은 듣고 공감하면서 내 이야기는 잘하지 못해서 외로운 건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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