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적 효자 남편 곁에는 독박육아로 죽어가는 아내가 있었다.
‘아들 이름이 뭐였더라? 만재..아 맞다. 준이.’
2012년 가을, 일을 그만 두고 아줌마들과 수다 중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던 생각이다. 1년동안 무리한 일정으로 일한 결과 건강이 상해 퇴사했다.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진 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심각한지 몰랐다. 아들의 이름이 바로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여러번 있고 나서 그 심각함을 받아들였다.
아들을 낳으면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연이어 썼다. 복직 할 때쯤, 육아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에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아들 돌보는 일은 내게 가장 중요했다. ‘엄마가 출산 후 3년은 아이만 돌봐야 한다.’라고 육아서에 적혀 있었다. 산책과 적절한 수면, 규칙적인 생활, 좋은 책을 고르고 읽히는 것, 영어 책을 읽어주는 것 등등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나 대신 이 모든걸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 두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컸지만 나는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완전 독박육아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함께 밥먹고 놀고 잠을 잤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둘이었다. 남편은 임신때 배 위에 손을 얹거나 태명을 불러본 적도 없었다. 그는 아침에 출근해서 밤 늦게 들어왔다. 또 주말은 텔레비젼을 보거나 잠을 잤다. 아들은 항상 6시에 일어났다. 주말 아침에 거실에서 아들과 놀다보면 그는 짜증을 냈다. “시끄러.” 우린 간단히 아침을 먹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는 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지 않았다. 식탁 앞에서 도저히 맛없어 못먹겠다며 라면을 끊여 먹기를 여러번 한 뒤로, 나는 그의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전업주부 생활의 육아 스트레스가 폭발 직전 즈음, 헤드헌터에게 전화가 왔다. 00회계법인에 자리가 있는데 일을 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난 도망치고 싶었다. 급여와 조건이 꽤 괜찮았기에 신랑과 상의하여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일은 불규칙하고 출장이 많았다. 출근은 10시까지였지만 퇴근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나는 밤 10시에 퇴근하는 일이 잦았고 새벽 1~2시에 돌아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출장소가 집에서 거리가 멀어 버스로 1~2시간 걸렸다. 평일엔 시어머니 집에서 잠을 자고 출퇴근 했다. 일을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첫 출근하는 날부터 신랑은 칼퇴근 했다. 만 2년동안 신랑은 10시 이전에 들어온 적이 거의없었다. 일이 없는 날도 게임방이나 당구장, 혹은 맥주집을 들렀다가 집에 왔다.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게 걱정되어 매일 8시 전 시댁에 도착하는 모습에 배신감이 들었다. 더 놀라운 건 내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100% 아이를 돌보고 재우는 일은 내 몫이었다. 주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들은 밤마다 열번 이상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나는 매일같이 한숨도 못자고 출근했다. 주말이면 역시 100% 내가 예전처럼 아들을 돌봤다. 일이 너무 많아 내가 출근하는 날을 제외하고. 결국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열달 만에 일을 그만두었다. 신랑은 가끔 말한다. “너가 그때 조금만 더 견뎠으면 우리가 돈을 좀 모았을껀데…” 이 말을 들을 때면 한동안 피가 꺼꾸로 솟구쳤다. '너가 뭘 하긴 했어?' 지금도 당시일을 떠올리면 목이 콱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