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아이, 미소 짓는 엄마 그리고 수학대화
지난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매일 아침 예비 중학생 아들과 1인용 전기장판에 찰싹 붙어 무언가를 끄적인다. 우리는 꽁냥꽁냥 뒹굴뒹굴 각자 하고 싶은 걸 한다. 책을 읽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한다. 뜨끈한 바닥에 엎드려 놀다 보면 배가 슬슬 고파진다.
나 : 뭐 먹을래?
아들 : 짜장면.
나 : 아까 라면 먹었잖아.
아들 : 그래도.
나 : 음, 그럼 삼겹살 꿔 줄게. 짜장면은 내일 먹으면 어때?
아들 : 그냥 짜장면 먹으면 안 돼?
나 : 요즘 아토피가 올라와 걱정돼서 그러지…
아들 : 음, 알았어. 대신 양파도 구워줘.
나 : 오케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다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아들의 옆얼굴을 한참 바라본다. 산책할지 말지, 수학 공부는 얼마나 할지, 이번 주 영어 공부는 무엇으로 할지, 무슨 책을 읽을지 문득 생각날 때 물어본다. 뭔가 몰입하고 있으면 기다렸다가 다시 묻기도 하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투덕투덕한다. 오전 할 일을 마치면, 우린 그렇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장판 위에서 만났다.
지난 6년은 참 다사다난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게 뭔지 전혀 모르던 나는 아들의 감정을 읽을 줄 몰랐다. 엄마는 아들의 예민한 기질조차 알지 못했다. 배고프다 울면 기저귀를 갈아줬다. 싫다고 말하지 않으면 좋다는 뜻일 줄 알았다. 사회생활의 첫 시작인 어린이집 적응은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초등학교에서는 아들의 아픔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손톱을 물어뜯고 옷을 빨았다. 놀이터만 가면 징징대며 울었다. 어디를 가든 무표정하고 침울한 모습으로 내 옆에만 붙어 있었다. 밤마다 여러 번 깨어 울었다. 아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소리 없이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등학교 입학 후 상의가 침으로 흠뻑 젖은 채 하교하던 아들을 보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혼란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아들을 이해하려 사방으로 방법을 찾았다. 지금을 그 때와 비교해 보면 천지개벽이고 강산이 열 번 바뀐 듯하다. 아들이 변했다. 아니, 내가 달라졌다. 아들이 '산책은 싫어.' 하면 왜 싫은지 물을 알고 이유를 들을 줄 안다. 징징거리면 무엇이 불편한지 둘러볼 줄 안다. 집에 가고 싶다 하면 함께 있는 이에게 양해를 구할 줄도 안다. 나는 몸이 피곤한 날이면 누구에게든 솔직하게 쉬고 싶다고 말할 줄도 안다. 나를 돌보는 게 무엇인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걸 함께 찾아가는 방법을 익혔더니, 아들 표정도 밝아졌다. 내가 변하니 아들은 급격히 안정을 찾았다.
아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하루 30분~1시간 정도 나와 함께 공부한다. 즐겁게 깔깔거리며 공부를 마치기도 하지만 때론 씩씩거린다. 하지만 아들은 매일 행복하단다. 꿈이 뭐냐 물으니,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한다. 이유는 더 놀랍다. ‘배려해 주는 사람이라서’
이제 중학생이 된 아들은 점차 내게서 멀어져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행복하게 있기만 하면 된다. 아들은 힘들고 지칠 때 스스로 찾아올 테니 말이다. 지난 시간에는 나의 실패와 성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들은 친구들과 달팽이(전래 놀이)를 할 때마다 징징거리다 놀이를 끝냈다. 말 없는 아들이 가슴에 묻어둔 속상함을 조금이라도 꺼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로 매일 밤 온몸 마사지를 정성스럽게 했다.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사지하다 보면 아주 가끔 속상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매주 축구클럽에 갈 때 울고불고 난리 치던 아들이 딱! 울음을 멈췄던 날 이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항상 조용하던 아들이 어느 순간 수다쟁이가 되었고 4학년 때는 야구를 하겠다며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미친 듯이 행복을 찾아 돌아다니다 도착한 여기엔 행복이 가득하다. 이리 못난 에미도 행복할 수 있다면 누구든 행복해질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모든 엄마는 행복해져야 한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는 자녀가 있기에. 아쉽게도 여전히 많은 엄마가 자녀와 갈등을 빚는다. 특히, ‘교육’ 때문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걸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그들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나의 행복 바이러스와 노하우를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니 글이 써졌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나처럼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