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엽엽 May 23. 2024

잠수 이별한 남친에게 쓰는 편지

잠수이별 당한 후 1년, 전화가 왔다. 

 중기야, 오랜만이야. 잘 지내니?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몰라서 내 친구들이 불렀던 ‘중기’라는 별명으로 너를 불러봐. 송중기 닮았다고 중기였는데, 기억나니? 네가 듣고 엄청 웃었었는데. 너는 이 브런치의 존재도 모르고, 또 들어올 일도 만무하니 아주 진솔하게 내 마음을 말해줄게. 나도 그 때의 연애사를 너무 오랜만에 들춰보는거라, 다소 기억이 뒤죽박죽이야. 하지만 인간이란 다 그런 게 아니겠니. 아마 나는 나에게만 유리한 이야기들을 기억할거야. 그런데 말야, 난 여전히 우리 관계에서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거 알지? 근데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말야. 너와의 관계에서는 내 잘못이 하나도 없어보여. 


갑자기 너에 대해서 몇 마디를 시작하는 건, 며칠 전 네가 전화를 했기 때문이야. 물론 난 ‘방해금지모드’를 해놓아서 전화가 온 줄도 몰랐어. 알았어도 받진 않았을거야. 방해금지모드- 그거 네가 가르쳐 준 거 였는데. 예전의 너는 나에게 늘 특별한 사람이라, 방해금지모드 따윈 가뿐히 뛰어넘었지만, 지금은 네가 전화 온 걸 보고도 ‘잉?’하고 마는 정도가 되었더라고. 그 날 왜 전화했어? 네 생일이라서 한거야? 네 생일인데 왜 나한테 전화를? 나 사실 네 생일도 기억 못해서 한~참 지나버린 예전 문자들을 검색해서 찾아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관심 없는 건 기억을 잘 못하잖아.


물론 네가 나를 차버린 이후로 이번이 처음 걸려온 전화는 아니지. 내 생일에 너 전화했었잖아. 몇 번의 전화와 몇 번의 문자. 물론 나는 답장을 할 이유를 못 찾아서 묵묵부답 했지만 말야. 근데 그때는 네가 좀 괘씸했거든. 우리가 서로의 애인이었던 동안, 너는 나와 단 한번의 갈등으로 내 모든 전화와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지. ‘잠수’탔잖아 너. 나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다’는 말만 남기고, 내 연락을 안 받았잖아. 내가 그때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했는지 알아? 그리고는 잘못했다는 말과 함께 돌아와서는 너 나한테 얼마나 냉랭하게 굴었니. 나는 이유도 모르고 너의 차가운 말과 표정들을 다 견뎌야 했어. 왜 헤어지자고 안했냐고? 너를 좋아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헤어지려고 마음 먹을 때마다 너는 ‘미안하다’며 진심어린 말들로 돌아왔잖아. 순진한 나는 그걸 다 믿은거지. 


그리고 이 관계가 반복되면서 불안함에 못이겨 너를 보채던 어느 날, 너는 아예 연락을 끊어버리더라. 나는 살면서 ‘잠수’타는 사람을 실제로 처음 봐서 진짜 너무 당황하고 놀랐어.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순간에 연락을 끊어버린다는게 나로서는 진짜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어. 그래서 더 받아들이질 못했던 거 같아. 그리고 5일 후에 부활해서 온 첫 연락이 ‘출근했어? 오늘 볼 수 있어?’ 였지. 그리고 우리 회사 앞 커피빈에서 우리 30분 만에 헤어졌지. 너는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노력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나는 정말 노력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어. 너는 그냥 그 자리에 있기도 싫어보이더라. 내 커피가 다 식기도 전에 너는 일어나고, “잘 지내”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떠났지. 나 울지도 않았어. 아주 솔직하게 말해줄까? 나 사실은 좀 속이 시원했어. 이건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그때 너한테 차여서 엄청 통쾌했어. 고맙기도 했고. 상실로 인한 아픈 마음과는 별개로 나 너무 상쾌했어. 


왜였겠니, 중기야. 너와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걸,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도무지 내 손으로 관둬지지가 않더라. 난 내가 왜 그렇게 이 관계를 끝내지 못했는지를, 우리가 헤어지고나서 한참 동안 고민했어. 이런 경험이 없던 것도 한 이유였겠지. 그 전에 내가 만났던 남자친구들은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이별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게 헤어졌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좋은 사람임을 믿고 있기 때문에, 너와의 이런 이별과 연애가 정말 적응이 안되었거든. 


내가 내린 결론은 말야. 나는 네가 나와 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희망회로를 돌렸던 것 같아. 너도 INFJ잖아. 그리고 우리를 만나본 서로의 친구들이 ‘남자 김엽엽, 여자 이중기’라고 할 정도로 우리 비슷했잖아. 취향도, 성격도, MBTI도. 그래서 나는 너에게 내가 가진 마음이, 태도가, 논리가 있을거라고 믿었던 것 같아. 결론적으로 우리는 양극단의 사람들이었지만, 너는 회피하는 사람이고, 나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고. 너는 수동적으로 나를 공격하고, 나는 능동적으로 방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 그래서 너 때문에 INFJ 트라우마 생겼잖아. 


너와 나의 성격 차이 뿐 아니라, 우리의 나이, 사회적 위치도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쳤겠지. 중기야, 난 네가 나보다 4살이 어리다는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요즘의 네 모습을 보면, 정규직으로 4대보험의 짜릿함을 누리는 네 편안함이 보여. 그게 우리의 차이였겠지? 너 인턴하면서 취업준비할 때 우리가 만났으니까, 너의 인턴 생활, 취준 생활, 비정규직 생활, 정규직 생활. 우리 이 시간들을 같이 경험했잖아. 너 처음 그 회사 비정규직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 성수동 식당 앞에 줄 서 있었고, 합격 전화를 받고 나 너무 좋아서 방방 뛰었잖아. 그런 시간들은 나한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긴 해.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다는 게 말야. 


나도 헤어진 직후에는 너에게 나와 함께한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걸까 하고 다소 슬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네가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그렇진 않을 거 같아. 네가 졸업하고, 취준하고, 성장하고, 입사하는 모든 순간에 내가 같이 있었는데. 인생에서 그게 얼마나 큰 일인데 말야. 중기야, 너 그래서 전화한거지? 나랑 헤어지고 한 1년쯤 놀거 다 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회사생활 다해보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자주 생각나지? 내가 말했잖아. 나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나는 네가 얼마를 벌든, 어떤 일을 하든 그런건 다 상관 없었어. 그냥 너 자체로 좋았으니까. 


그치만 지금도 자주 생각해.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밉다고 한 순간에 연락을 끊어버리고, 같이 있어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차가울 수 있었을까. 나는 너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여전히 이해가 안돼. 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여름 같이 찬란하고 밝은 사람이고, 스프링쿨러처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봐. 그래서 우리는 같이 할 수가 없는거야. 같이 하고 싶지도 않고. 나 그래서 네 연락 다 안받은거야. 물론 이젠 다 차단해서 연락 올 일도 없겠지만. 


중기야, 나를 차버리고 나서 두번이나 전화줘서 고마워. 덕분에 나 더욱 속 시원했어. 그리고 나 지금 빈틈없이 행복해. 너랑 만날 때도 행복했겠지만, 자주 설레고 많이 웃고, 좋은 추억들도 많지만 네가 나를 소홀히 여겨준 덕분에 단 한 톨의 미련도 없이 그 관계에서 잘 빠져나왔어. 중기야, 나는 사랑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한번 마음에서 어긋난 사람에 대해서는 잘 돌아서지질 않더라. 그것도 너랑 비슷하니? 


다만, 헤어진 직후와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그리고 구남친인 네가 처음 전화했을 때와 며칠 전 전화 사이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네가 편안하고 즐거운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좋아. 너도 행복해도 될 거 같아. 난 정말 행복하고, 네 덕분에 사실 굉장히 많은 걸 배웠거든.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줄게. 그래서 중기야, 만일 너 나한테 미안하다면, 그래서 전화한거라면 나에게 사과하는 방법은.. 너 스스로를 좀 더 너그럽게 생각해주는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 상처주지 말고 임마. 건강하고, 네 예쁜 동생들 잘 챙기고. 네 동생들 참 나한테 잘해주고 다정하고 예뻤는데.


너랑 나는 예전처럼 그냥 알바하면서 만났던 아는 지인이었으면, 친구였으면 아마 지금까지도 정말 잘 지냈을거야. 네 주변 사람들이 다 너와 잘 지내듯 말야. 나도 네 애인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모습을 너무 많이 본 게 우리의 문제일까. 중기야, 살면서 완벽한 관계란 없어. 갈등이 생겨도 지금같은 방법 말고 조금 더 서로에게 건강한 방법을 찾길 바란다. 내가 너무 주제넘게 꼰대같니? 어 맞아. 나 꼰대야. 그러니까 한 마디만 더 하면, 아마 나만큼 좋은 사람 평생 절대 못 만날거란다. 찾기를 포기하렴. 그럼 이만.

작가의 이전글 2023년 새해에는 죽음을 생각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