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프랑스
결정적 결함
여행을 좋아하지만 나는 비행기가 두렵다.
1시간 걸리는 제주도를 갈 때도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대신 목포까지 기차, 목포에서 제주까지 배를 타고 최소 11시간은 걸려서 간다.
앞으로 20년간은 떠도는 삶을 살겠다던 나에게 친구는 말했다.
근데 비행기를 못 타잖아! 너무 결정적 결함 아니니?
한 2년 비행기가 힘들었고 이후 8년 정도는 비행기를 아주 못 탔었다. 다시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어느 날 병원에서 진단명(공황장애)을 받은 것이 되레 계기가 되었다. 비행 시 수면제 처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후 장거리 비행은 수면제 처방을 받아서 '겨우' 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국내 항공사여야 하고 직항이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조건도 맞아야 한다. 전날 가능하면 잠을 자지 않으려 하고 타기 전에 배부르게 먹거나 물을 마시지 않으려 애쓴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도 여권보다 주머니에 약을 먼저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남몰래 손에 땀이 나고 숨이 가빠왔다. 비행기에 앉자마자 물도 없이 약을 꿀꺽 삼켰다.
프랑스까지 14시간의 긴 비행.
줄곧 잠들길 바랐지만 나는 5시간 만에 깨났다. 다행히 터뷸런스는 없었고 큰 흔들림도 없었다. 오랜만에 기내식도 먹고 영화도 보면서 멘탈을 부여잡았다. 내릴 때쯤 다리가 풀려있었으나 긴 비행, 좁은 좌석에서는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휴...
나는 죽지도 않고 죽을 뻔하지도 않았다.
이제 조금 수월하게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걸까? 도대체 왜 비행기를 못 타게 된 거지? 나도 공항이 낭만적이었던 때가 있었다고!
어쩌면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게 된 것도 이 공포증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오래전 출장길에 택시 사고를 당한 이후로 서서히 자동차 트라우마가 왔었다. 이를 시작으로 비행기는 물론 버스와 지하철까지 타기 힘들어졌던 때가 있었다. 모든 대중교통이 무서우니 웬만한 거리는 걸어가는 게 나았다. 그러다 보니 걷는 게 그냥저냥 속 편하고 맘 편하고 최고로 좋았다.
걷는 걸 선호하다 보니 걸을 수 있는 길들이 보였다. 그 길을 걷다 보니 지구 끝까지 걸어가고 싶어졌다.
등산과 트레킹에 취미가 생기고 미술관 중심으로 여행하던 내가 어느새 걷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공포에 대한 회피가 취미를 만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배에 깃발 하나를 달아준 셈이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어릴 때 엄마가 수평선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수평선이 양쪽 끝으로 뻗어 있지 않고 우리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걸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나는 수평선을 볼 때마다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그렇게 지구를 실감한다.
제주도 어딘가에서 바다 수평선을 보며 걷는데 나도 모르게 동요 “앞으로"를 흥얼거렸다. 그때부터 이 노래는 나의 주제가가 되었다.
나는 죽지도 않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저녁, 나는 죽지도 않고 무사히 파리 샤롤 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근처 호텔을 예약해 두었고 간단한 스낵과 맥주를 마트에서 사 와 숙소에서 먹기로 한다.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 파리 도심과 보르도, 바욘을 거쳐 생장으로 간다. 오늘에 이어 내일도 긴 이동의 하루가 될 것이다. 다른 것에 힘을 주고 싶지 않다.
가장 두려웠던 비행을 한차례 끝내고 나니 왠지 모르게 차분하고 담담해졌다.
나는 살아남아 여기 있구나.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니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진다. 까만 밤에 내가 비칠 때까지 공항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