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대모험 : 생장으로 가는 길

파리공항 - 보르도 - 바욘 - 생장

by OHz 오즈



프랑스 길의 시작, 생장으로 가는 길

오늘의 여정은 대략 이렇다.


- 우선 호텔에서 전철을 타고 공항으로 돌아가야 한다.

- 공항에서 TGV 지하철을 타고 약 4시간을 달려 보르도(Bordeaux)역으로 가면 아마도 11시쯤 될 것이다.

- 여기서 한 시간 대기 후 다른 열차를 타고 2시간쯤 더 가서 바욘(Bayonne)에 내린다.

- 또다시 30분 정도 기다린 후 다른 기차를 타고 1시간을 가면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생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한다.


아침 6시에 시작해 오후 4시에 끝나는 10시간 대이동의 날.


나는 엄청난 길치, 방향치여서 지도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길을 찾는다. 절대로 내 감을 믿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정말 길치들은 역설적으로 지도를 정말 잘 볼 수밖에 없다. 평소에도 지도를 보는 훈련이 되어있어서(신경 가소성이라고 하던가) 아이러니하게 여행지에서는 오히려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여러 번 환승해야 하는 오늘 같은 여정에 길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풀 충전된 핸드폰과 지도 앱, 만일을 대비한 보조배터리 그리고 초능력.. 아 아니, 집중력.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시야가 좁아져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병원에 검진받으러 가면 오른쪽으로 돌아서 1번 긴 의자로 가세요,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생각해 내야 하는 것처럼.


그러니 여유 있게 출발하는 수밖에 읎다. 다음 일정을 예약해 둔 경우 중간에 헤매다 늦으면 더더욱 낭패다. 최대한 사인물, 표지판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가야 한다. 여하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두근두근.




비오는 플랫폼

보르도의 기차역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다음 열차까지 한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근처라도 둘러볼까 싶었다. 하지만 나와서 좀 걷다가 이내 마음이 바뀌어 작은 상점에서 커피와 빵만 사고 역으로 돌아갔다. 크고 활기가 넘치는 곳이란걸 알게 된 순간 약간의 두려움과 피로도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규모의 도시를 어설프게 돌아봤다간 갈 길을 잃거나 아쉬움만 커질 수 있겠구나. 지친 몸과 머리에 잠시 여유를 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역의 빈자리를 찾아 배낭을 내려놓고 목과 어깨 스트레칭부터 한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그제야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늘이 보이는 높은 천장과 거기에 걸려있는 큰 시계가 멋스럽게 느껴졌다. 덕분에 여기서는 시간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겠다. 역이라는 곳이 이방인들로 가득해서인지 초라한 행색의 내가 썩 튀지는 않아 보였다.


어느덧 나는 역 안 풍경의 일부가 되어 기차를 기다린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 따라 기차를 타는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좀 전과는 달리 하늘이 온통 흐리다. 오늘 비 소식이 있었던가 생각하는데 어-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쏴-


비 내리는 기차역이 이렇게 낭만적이었던가. 부산을 떨던 플랫폼의 사람들이 순간 멈춰서 하늘을 보고 빗소리를 듣는다.

내리는 빗속에 마치 시간이. 순간. 멈춘 것 같았다.


프랑스 보르도 역. 비 오는 플랫폼



모두가 그토록 원하는 곳

비가 오다 개다 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꾸벅꾸벅 졸고 만다. 깰 때마다 엉덩이가 불난 듯 아파와 자세를 고쳐 앉는다. 바욘부터는 나처럼 큰 배낭을 멘 사람들이 부쩍 많이 보인다. 프랑스 까미노의 출발지이자 오늘의 도착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마을, 생장 피에 드 포르(이하 생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바욘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선로 보수공사로 취소되어 버스가 대체 운행되고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공지를 받았기 때문에 당황스럽진 않았다. 나와 같은 곳을 갈 것 같은- 이를테면 큰 배낭을 메고 있는 사람들을 단서로 따라가면 되겠지 하고 그들 옆에 섰다.


갑자기 바욘에도 비가 내린다. 빗속에 무방비로 걷던 사람들이 역으로 뛰어 들어온다. 우비를 쓰고 개구쟁이 표정으로 뛰어오는 동양인들 옆으로 비 맞은 개가 자기 몸을 턴다. 북적이던 광장이 순식간에 비워진다.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본다.


2년 전, 오지도 못한 바욘의 숙소를 예약했었다.

팬데믹만 아니었다면, 그때 아마 이곳에 도착해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생장으로 갔을 테지...

무심코 옛날 일들을 떠올리다가 역 안으로 섞여 들어온 담배와 비 냄새가 나를 다시 서릿한 현실로 돌려놓는다. 비는 시간을 멈추게 하거나 사람들의 기억을 되감는 신의 연출인 게 분명하다.


쏟아지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치고 대기 중인 버스에 사람들이 타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순례자 배낭을 메고 있다. 답답증이 있어서 창가보다 복도 쪽을 선호하는데 맨 뒤 다섯 자리 중 가운데가 비었다. 나름 앞 시야가 트여있는 자리니 나에겐 딱이다.


예비 순례자들로 가득 찬 버스는 구불한 마을 길을 달린다. 묘한 설렘과 긴장감 같은 어색한 공기를 가득 싣고. 나의 작은 대모험의 끝이자 시작, 모두가 그토록 원하는 곳, 생장으로 가는 중이다.



바욘역. 갑자기 쏟아지는 비



Bonus

- 프랑스(생장까지) 교통편 예약 : SNCF Conn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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