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자들의 속사정

생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

by OHz 오즈



순례자 오피스


생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순례자 오피스에 가야 한다. 이번에는 길을 몰라도 걱정 없다. 모두 그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순례자 오피스는 상상했던 것보다 작고 아담했다.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이 가능한 몇 가지 언어로 구분해 순례자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영어로 구분된 줄을 서다 보니 우연히 앞뒤가 한국 사람이다. 어쩌면 앞으로 까미노에서 자주 마주칠지도 모르니 용기 내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내 앞에 선 두 분은 한국인 중년 부부인데 실은 바욘에서부터 같은 버스를 타고 왔다. 나는 두 분이 빗속에 우비를 쓰고 바욘역으로 뛰어오는 것도 보았다. 그러니 여러모로 내가 만난 첫 번째 순례자 친구가 되겠다.

뒤에 여성은 나처럼 혼자 온 것 같다. 우리는 자원봉사자가 두 번 설명하지 않도록 함께 순례길 안내를 받기로 한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자원봉사 아저씨가 순례자 크리덴셜에 첫 번째 쎄요(도장)를 쿵 하고 찍는다. 이제 정말 순례자가 되었구나. 심장도 쿵 하고 뛴다.

다 된 건가 일어나려는데 숙소 예약을 했는지 물어본다. 예약을 안 했으면 거의 풀 부킹일 수 있으니 빨리 숙소부터 알아봐야 한단다.


보통 예약을 안 해도 일찍 도착해 선착순 안에 들면 공립 알베르게(일명 55번 알베르게)에 묵을 수 있다. 나는 오후 4시에나 마을에 도착할 것을 예상해 맘 편하게 사립 알베르게로 예약을 해놓았다. 그래도 막상 현지에서 숙소가 거의 찼을 거라는 말을 들으니 까미노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실감이 되었다.


*알베르게란 까미노위에 있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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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금을 조금 내고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개와 한국기업이 후원해 만든 가벼운 에코백을 챙겨서 나왔다. 북적대던 오피스를 나와서야 함께 안내받은 분과 인사를 나눈다. 나의 두 번째 까미노 친구 JM. 일단 내가 예약한 숙소에 빈자리가 있을지 모르니 함께 찾아가 보기로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부딪혀 보는 JM의 긍정적이고 당찬 모습이 참 부럽고 보기 좋다.


내가 예약한 알베르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까미노 루트와도 근접해 있고 큰 길가에 있어서 꽤 좋은 위치라고 생각되었다. 뭔가 바쁘고 정신없어 보이는 큰 눈의 곱슬머리 호스트가 우릴 맞이한다. 한국인들이 벌써 많이 다녀갔는지 한국어로 된 안내문도 있다.


여기도 역시나 예약은 찼지만 로비에 간이침대가 있어서 원하면 거기 머무를 수 있다고 한다. 시간이 늦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JM은 흔쾌히 Yes를 외친다. 낯가림이 심한 나와는 달리 누구에게도 척척 말을 건네는 용기 있는 JM. 처음 만난 나를 살갑게 챙겨주는 마음이 좋은 이 언니와 나는 단 몇 시간 만에 친구가 되었다.





떠나온 자들의 속사정


호스트 아저씨가 큰 눈을 굴리며 자꾸 저녁 커뮤니티 디너를 제안하길래 망설이다가 결국 신청했다. 그런데 세상에 나 이거 신청 안 했으면 어쩔 뻔. 기대 이상으로 맛있고 정성 가득한 음식을 내어주신다. 알고 보니 요리도 잘하고 흥도 끼도 아주 많은 유쾌한 호스트였다. 덕분에 신나고 귀한 커뮤니티 디너를 첫날부터 제대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순례길을 준비하며 조용히 지낼 것 같았던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흥겹고 정겨웠던 생장의 저녁. 각국의 순례자들이 모여 와인을 마시고 떼창을 부르는 영화 같은 장면이 작은 알베르게에서 펼쳐졌다.

나는 그런 테이블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다가도 문밖으로 나가 마을의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늘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내일 쾌청한 피레네산맥은 보기 어렵겠구나. 비는 안 오면 좋겠는데.

긴 하루,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어느새 조금씩 풀린다.


생장은 프랑스 길을 걷는 순례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순례자들의 시작을 응원하고 배려해 주는 마을 사람들의 미덕 덕분이기도 하지만, 순례길을 시작하는 이 순간의 가슴 벅찬 떨림과 울림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전혀 다른 우리 모두가 비슷한 감정과 고난을 느끼는(혹은 느낄) 순례자라는 사실이 군중 속에 늘 홀로 고독했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겠지.


내일부터는 내가 알 수 없는,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의 시간들을 걷게 될 것이다. 두렵고 심난하지만 여기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가슴이 벅차다.


내일이 걱정되는 나는 소등하기도 전에 어느 누구보다 빨리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어두운 방에서 첫 순례길을 준비하는 순례자들의 떨리는 숨들이 들린다. 몸은 여기 프랑스의 작고 낯선 마을에 왔지만 마음은 아직 거기에 있는 사람들.


밝게만 보이던 미국 아저씨는 쉽게 가족과 통화를 끊지 못하더니 숙소에서 담담히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두 아이를 아내가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그런 아내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마음이라고. 배낭보다 더 큰 마음의 짐이 여기 있는 내내 그를 괴롭게 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화기 너머로 들어주는 일 밖에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책임까지 어깨에 지고 있을 누군가가 있기에 마냥 즐기고 설렐 수만은 없는 복잡한 마음.

그리고 다 털어놓을 수 없는 그만의 사정.

우리도 각자 남겨놓고 온 누군가를 남몰래 떠올리며 서툴지만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이제 막 순례자가 된 사람들의 기나긴 밤 위로 오래된 이야기가 소리 없이 흐른다. 바스락거리는 침낭을 목까지 끌어당기고 애써 눈을 감는다.


그래도 모두 굿나잇.




Bonus!

* Albergue : La vita é b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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