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생장 피에 드 포르 - 론센스바예스
부엔 까미노!
잠을 자긴 한 걸까. 잘 모르겠다.
그냥 5시에 일어나게 되었고 기척도 없는 방을 조용히 빠져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래된 나무계단의 삐그덕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1층 로비 카우치에서 쪽잠 자고 있던 JM과 자전거 순례객은 내가 내려오는 소리에 뒤척거린다. 아래층 화장실을 쓰고 얼른 짐들을 모두 챙겨 식당으로 나와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곳이 객실과 분리되어 소음이 덜하기 때문이다.
배낭 꾸리는 것이 서툴러 30분째 물건을 넣어다 꺼냈다 반복하고 있다. 특히 침낭을 접어 넣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일 줄이야.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다. 잠에서 깬 JM이 어느새 옆에 앉아 있다. 숙소에 조식을 신청해서 일찍 떠나지 못하는 그녀는, 어두운 길을 혼자 떠나는 내가 걱정이 된 모양이다. 자는 언니를 깨운 거 같아 미안해진다.
서툴고 오랜 정비를 하고 나니 출발하기도 전에 땀이 나고 기운이 다 빠졌다. 벌써 이렇게 힘이 들다니, 오늘 갈 길이 구만리인데 어쩌나. 나보다 더 걱정스러운 눈빛의 JM은 어제 가게에서 산 사탕을 한 움큼 챙겨주며 문밖까지 배웅을 해준다. 언니, 또 만나요!
그리고 나도 드디어 수줍게 외쳐 보는 한마디.
“부엔 까미노! Buen Camino!”
그리곤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새벽 5시 40분. 아직 깨지 않은 어둡고 조용한 마을. 저기 가로등 아래로 다른 알베르게에서 나오는 순례자들 대여섯 명이 보인다. 해가 뜰 때까지 저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가야지 생각하며 좁혀가는데 반가운 한국말이 들린다. 어제 바욘에서부터 만난 나의 첫 번째 순례자 친구들, 한국인 세종 부부 선생님들과 그렇게 오늘도 만났다.
우리는 모두 마을의 끝에서 자주 두리번거렸다. 첫날이고 길의 초반인 데다 어둡기까지 해서 길에 확신이 없었다. 앞서 걷던 그들은 갈림길이 나오면 가끔 멈칫하고 뒤돌아섰다. 저만치 뒤따라 걷던 나는 얼른 지도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온몸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나는 느린 편이고 그들은 빠른 편이어서 금세 거리가 멀어졌다. 뒤에 오던 유럽피언 순례자들도 왜인지 보이지 않고, 마을을 벗어나 더 어두워지기만 하는 산길을 걷자니 난데없이 걸음이 빨라졌다. 숲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냄비 두드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아무리 들어도 당최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가 않아서 더욱 오싹해졌다. (전혀 규칙적 리듬이 없는 이것의 정체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동물 목에 단 종소리였다)
까미노에서 아침을
한 시간 반쯤 걸어서 7시가 되니 날이 조금씩 밝아 온다. 그제야 굽이굽이 올라온 길과 아름다운 산들이 보인다. 저 멀리 아직 불을 밝힌 마을도 보인다. 무심하게 눈을 마주치는 소들도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양들도 나와 함께 까미노의 아침을 맞이한다.
순례자들이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유명한 오리손(Orrison) 산장은 9시가 돼서야 도착했다. 생장 마을에서 약 7.6km 떨어진 곳인데 출발한 지 3시간 20분 만에 왔으니 그야말로 등산을 한 셈이다. (보통 평지라면 4km에 1시간 정도 걷는다) 지도를 보며 전체 24.2km 중에 1/3도 못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살짝 현타가 왔다.
와.. 이제 시작인 거 사실 아니라고 누가 말 좀..
오리손에 이미 도착해 있는 세종 선생님들이 반겨 주신다. 커피와 오렌지주스, 또르띠야를 주문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 유일한 쉼터이기 때문에 조식도 먹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재정비도 해야 한다. 비는 오지 않았는데 땀 때문에 얼굴과 머리카락이 비 맞은 꼴이다.
얼굴을 닦으려고 하는데 뭔가 얼굴에서.. 가루가 떨어진다..?
응? 이게 뭐지, 무슨.. 모래바람이 불었었나?
아..! 내 얼굴에 소금 같은 게 떨어지고 있었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힘들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단 몇 시간 걸어 올라왔다고 소금이? 얼굴을 닦아보려 했으나 닦을수록 스크랩하듯 피부가 아프기만 해서 그만두었다.
황당한 내 모습이 왠지 시트콤스럽고 우스워서 혼자 실소가 터졌다.
막막함과 두려움은 알 수 없는 '빠워'를 주기도
오리손산장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마냥 보고 싶었지만 더 지체할 수가 없다. 벌써 많은 순례자가 나를 지나쳐 갔고 아직 알 수 없는 길이 한참 남았다. 다시 걸을 채비를 하고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간다.
피레네산맥을 넘는 첫날 코스는 프랑스 까미노 중에 가장 힘들기로 손꼽히는 길이다. 실제로 걸어보니 한국의 험한 산처럼 극도로 힘든 길은 아니었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것들, 이를테면 배낭의 무게라든지 길의 난이도나 길의 상태 같은 것들을 가늠할 수 없다는 심리적 두려움이 컸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은 나를 지치게도 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빠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산장 앞에서는 그나마 풍경이 보였는데 올라갈수록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저 앞에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계속 걸어가는데 막상 거기에 가면 내 주위는 괜찮고 또다시 저 앞만 자욱할 뿐이다. 이런 안개가 자욱한 곳을 오래도록 걸어본 적은 없었다. 자욱한 물안개, 동물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이상한 산길 같은 조금은 비현실적인 풍경들 속으로 자꾸만 들어가고 있었다.
내 힘든 몸은 현실로 느껴지나 눈앞의 풍경은 매우 낯선, 현실과 비현실을 동시에 경험하는 이 기분은 마치 꿈인 줄 알고 꾸는 꿈처럼 묘하게 즐거웠다. 하지만 이런 기분도 서서히 사라질 테지. 낯섦도 언젠가 익숙해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이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다.
멈추는 것은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
산맥을 둘러서 올라오던 길이 어느새 숲속으로 향한다. 지금까지 피레네산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시작되니 이제 거의 온 것일까? 이 길만 지나면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이 길은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두 시간을 더 올라가야 그제야 산의 정상으로 갈 뿐이었다.
새벽 5:40에 출발해 오후 1:15에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 올라섰다. 정상이라지만 여기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니 감회 같은 게 따로 있지는 않았다. 오늘 거치는 길 중 하나일 뿐, 정상에 오르기 위해 걸어온 것이 아니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고 차츰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저 멀리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피레네산맥의 내리막은 가파르다고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경사가 있었다. 더군다나 자칫하면 미끄러질 수 있는 자갈길이라 상당히 집중해서 내려가야 했다. 30일 이상 걷는 까미노는 장기전인데 첫날 발목이나 겹질리면 안 될 일이다. 다행히 자갈들 사이에서 몇 번이고 휘청거리는 발목을 미드컷 운동화가 잘 잡아주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겠다고 생각하며 내려갈 때쯤 때마침 길에 반짝이는 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생각 없이 다가가 들여다보는데 무한대 표식 같은 것이 되어 있다. 또 한 번 실소가 터진다. 그렇다. 아마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으로 표식을 해 놓은 것이 분명해. 다시 말해, 이 길은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발목은 등산화 덕을 보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된 무릎은 첫날, 이 내리막길에서부터 탈이 나고 말았다.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멈추는 것은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훨씬 힘들었다. 금방 끝날 것 같은 내리막길은 무한대로 계속되었고 그저 무릎이 조금만 더 견뎌주기만을 바라며 최대한 발가락을 지탱하며 내려갔다.
이쯤 되면 어떤 생각이 날 리 없다. 그저 올라갈 때와는 또 다른 내리막길의 고통을 느끼며 간절히 내달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