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우리를 줌아웃해서 볼 수 있었다면

Roncesvalles

by OHz 오즈



메타버스 같은 가상 세계에 와 있는


그래도 계속 가다 보면 갈 곳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오래된 건축물. 이제 정말 다 왔구나 하는 순간 발이란 놈이 가장 먼저 반응하며 급하게 저릿거린다. 당장 신발을 벗어버리고 싶다. 시계를 보니 2:47 pm. 새벽에 출발해 9시간 걸렸지만 내심 목표로 했던 시간(오후 3시) 안에 도착했으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론센스바예스.

프랑스에서 출발했던 나는 어느새 걸어서 국경을 넘고 스페인 론센스바예스에 도착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370여 명의 순례자들이 머물 수 있는 대규모 알베르게와 식당이 있다. 저녁에 순례자 미사도 있어서 원하면 참여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 영화를 보면 상징적으로 꼭 나오는 곳 중 하나이다. 워낙 전통 있는 곳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순례자가 그들의 까미노 첫날을 보내는 곳이라서 알베르게의 원형, 상징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예전에는 시설이 오래되고 열악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신관이 지어지기도 해서 생각 이상으로 쾌적하고 훌륭한 곳이다.


이 근방의 유일한 알베르게이기 때문에 프랑스 길을 걷는 거의 모든 순례자가 이곳에 모인다. 그러니 사람이 몰리면 대기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도착하고 한 시간 조금 넘게 밖에서 기다렸다가 그제야 침대 배정을 받고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대기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빠른 일 처리를 기대했다가는 괜히 불만스러울 수 있다. 오랫동안 운영된 이곳의 규칙을 존중하고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마음을 비우는 것이 좋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신관 3층. 무릎을 절룩이며 계단을 간신히 올라가는데 온통 나처럼 절룩거리는 순례자들로 가득하다. 눈이 마주치면 공감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 길을 터주기도 하고 우리의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러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빵 터지기도 했다.


침대에 커버를 씌우고 침낭을 깐다. 좀 쉬고 싶지만 한번 올라가면 내려오기 힘든 2층 침대라서 올라갈 엄두가 안 난다. 일단 씻고 빨래부터.


소금 낀 몸을 대충 씻으니 개운함에 살 것 같다. 샤워 후에는 세탁기, 건조기와 손빨래 시설이 있는 지하 세탁실로 절룩거리며 내려간다. 세탁기가 간절했지만 어차피 매일 세탁기 사용을 할 순 없으니 하루빨리 손빨래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손빨래 시뮬레이션은 여러 번 해보았지만 실전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단 물이 자동으로 잠기는 수도꼭지라서 한 손으로는 빨래를 나머지 손은 물을 계속 틀어야 하니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계속 서있자니 무릎과 발은 서로 자기가 더 아프다고 하고 서툰 손은 빨래를 하는 건지 죽을 쑤는 건지 모르겠다.


아, 이것이 바로 내가 꿈에도 그리던 그 순례자의 일상이로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타가 밀려와 또다시 실소가 터진다. 하지만 뭔가 즐겁다. 뭔가 뿌듯하고 뭔가가 재밌다. 익숙했던 현실과는 너무 달라서 무슨 메타버스 같은 새로운 가상 세계에 와있는 이 기분. 이상하게 앞으로의 까미노 일상이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


서투른 첫 번째 손빨래를 무사히 마치고 자판기에서 오렌지 환타 하나를 뽑아 앉았다.

이제야 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것이라곤 오리손 산장에서 먹은 또르띠야 반 조각과 귤 한 개. 배가 고플 법도 한데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시원하고 달달한 탄산만 들어갔다.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사람들


다시 침대로 돌아가니 옆 침대 1층에 누군가 와있다. 그는 침대 위에 온통 배낭 속 물건들을 꺼내놓고 뭔가를 심각히 고민 중이다.

많은 순례자가 첫날 걸으며 배낭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고 도착한 후 불필요한 것들을 기부하거나 버려서 배낭의 무게를 줄인다. 버리지 않더라도 대다수가 오늘을 경험 삼아 배낭을 점검하며 짐을 다시 싸게 된다.

아마도 그런 작업을 위해 배낭 속 물건을 모두 꺼내어 정리 중이던 이 아저씨는 이탈리아에서 온 미카엘이라고 한다.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부드럽고 젠틀한 말솜씨를 지녀서 처음 대화하는데 어색함이 없을 정도다.


미카엘의 위 침대칸에는 아일랜드에서 온 올리라는 순례자가 뒤늦게 도착했다. 다 같이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서둘러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산속이라 기온이 낮았는데 샤워하고 젖은 상태에서 얇게 입고 돌아다닌 것이 분명 문제였다.


큰일이다.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못 견디게 추워졌다. 가져온 모든 옷을 꺼내 입고 해열제를 챙겨 먹는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조금 자고 일어나야겠다.





침낭 밖으로 손 하나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한기가 와버렸다. 몸이 덜덜덜 떨린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눈앞이 캄캄했다. 저녁을 먹을 힘도 없었지만 오늘 9시간 산행을 하고도 먹은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살기 위해서라도 뭐든 먹어야겠다. 이를 악 물로 간신히 침대를 내려가는데 곡소리가 절로 난다. 화장실에서 얼굴을 보니 입술이 파랗다.


간신히 찾아간 순례자 식당. 식탁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음식이 아직 준비 중인가 보다. 맞은편에 앉은 유럽 아저씨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어 보지만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대화가 되지는 않았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아 더 애쓰지 않고 침묵을 지키며 마른 입술만 질끈 거린다.

너무 대비되게 옆 테이블에는 한국인 두 명과 외국인이 재미나게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우리 테이블에는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 지나가는 어색한 장면만 연출되었다.

까악까악까악-


드디어 와인이 서빙되고, 모두 시선 둘 곳이 생기니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나도 모르게 와인을 홀짝거리다 보니 술기운이 올라 몸도 한결 따듯해진다. 이어서 나온 뜨끈한 수프를 먹으니 땀이 나기 시작하고 어느새 한기가 사라져 입고 있던 패딩도 벗게 되었다. 역시 아플 땐 뜨끈한 국물이 최고였어! 몸과 정신이 개운해진다. 그제야 입이 풀려 앞에 앉은 분들과 한두 마디 건네보았다. 우리에겐 구글 번역기와 초능력이 있었으니. 서로 엄청난 초능력으로 대화하며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다.


침대로 돌아오니 미카엘이 아직도 침대 위에 물건들을 펼쳐놓고 고민 중이다.


이 물건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어!

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이 민머리 아저씨가 나는 너무 귀엽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도 아직 내 배낭 속의 물건을 꺼냈었다 넣었다 수없이 반복하고 있으니. 위로가 되는 것은 여기 모인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고민과 시행착오 중일 거라는 사실이다. 누군가 줌아웃해서 우리를 한 번에 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모두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아직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선 순례자들의 첫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Bonus!

론세스바예스 예약
https://alberguederoncesvall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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