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biri - Pamplona
수비리 - 팜플로나
해 뜰 때까지 같이 걸을까?
같은 방 친구들에게 나는 오늘 일찍(5시)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다.
짐도 다 싸놓았다. 일어나면 침낭과 핸드폰, 배낭만 들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결론은 망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사정없이 정적을 깨고 옆방의 개 두 마리가 엄청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어제 큰 개들과 함께 걷는 순례자들을 보았는데 하필 옆방에 묵었던 것이다. 그들도 놀라서 바로 개들을 안심시켰지만 다른 순례자들을 깨웠을 것이 분명하다.
아띠... 괜한 미안함에 눈을 질끈 감고 얼른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어두울 줄 알았던 창고에 불이 켜져 있다. 어, 누가 벌써 나와 있나 하며 들어가는데, 하얀 배추 머리에 볼이 핑키한 내복 차림의 귀여운 유럽 할머니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있다. 이곳은 침실이 아니라 세탁기가 있는 창고 같은 곳인데, 여기 간이침대에서 잤던 모양이다. 불편했을 텐데 그런 기색 하나도 없이 나를 보더니 배시시 웃는다.
한쪽 구석으로 가서 빈속에 비타민을 꿀꺽 삼키고 나갈 채비를 한다. 침낭을 개고 배낭을 꾸리는 손이 어제보단 조금 빨라진 것 같다.
5:40 새벽길을 나선다. 밖은 아직 컴컴하고 조용하다.
무섭다. 큰일이군.
어, 그런데 저기 다리 건너 불빛이 보인다. 오예 누군가 있는 게 분명해. 최대한 가깝게 거리를 좁혀갔다. 그는 갈림길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쪽 길인 것 같아. 내가 방금 지도 봤거든.
저기 근데, 좀 무서워서 그러는데
해 뜰 때까지 같이 걸을까?"
그렇게 마리오와 만났다.
산길이라 랜턴을 비추지 않는 곳은 보이지도 않는다. 한 줄로 가야 할 만큼 길이 좁아서 둘이 나란히 유유자적하며 걸을 수도 없었다. 내 헤드랜턴이 그의 손전등보다 강력해서 주로 내가 앞서서 어둠을 헤쳐갔다. 문신을 잔뜩한 마리오는 동물이 무섭다며 좌우로 손전등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동틀 때까지 두 시간 정도를 정신없이 걸었다. 마치 긴 터널이나 동굴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걷는 동안 끊임없는 대화를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둘 다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아무 말(?)이나 주고받았던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밝아오자 걷는 속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너 아니었으면 이 어둠 속에 혼자는 못 걸었을 거야. 고마워.
서로 같은 인사를 하고 각자의 속도를 찾아서 걷는다.
랜턴을 끄자 그제야 입속에 죽어있는 벌레들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따라 돌진했을 날파리들을 퉤퉤 하며 뱉어내었다.
산중에 아주 멋지게 자리 잡은 바가 있었다. 무사히 어둠도 빠져나왔으니 쉬었다 가자. 다시 만난 마리오도 함께 테이블에 앉는다.
역시나 순례자들이 모이면 주로 하는 이야기, 오늘 목적지와 알베르게.
"팜플로나는 스페인 사람들도 좋아하는 도시야. 거기 올드타운이 진짜 멋지거든. 오래된 건물도 많고 놀기도 좋아. 오늘 저녁에는 꼭 맥주 마셔야지."
"그래? 나도 기대된다. 나중에 맥주 맛있는 곳 찾으면 알려줘."
"팜플로나 알베르게 예약은 했어?"
"아니 공립 알베르게 갈 건데 내가 걷는 게 느려서 걱정이네. 너는?"
"어 나도 거기 가야지."
마리오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있다. 팜플로나는 프랑스 길의 순례자들이 만나는 첫 번째 도시이다. 그래서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스페인 사람들도 놀러 갈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라고 하니 나도 덩달아 들뜬다.
쉬는 동안 바에 점점 많은 사람이 도착한다. 순간 그들이 같은 알베르게로 가는 경쟁자로 보인다. 콜록.. 아이쿠 안 되겠다. 어서 일어나서 출발해야지.
오래된 유럽식 돌다리를 건너니 교회가 보인다. 나는 종교가 있지만 기도를 안 한 지 오래되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까미노를 걷는 건 아니지만 교회를 들를 때마다 짧은 기도를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첫마디, 고맙습니다.
순례자 여권을 꺼내 순례자 도장(쎄요)을 찍고 교회를 나온다.
어디 보자, 아마도 팜플로나 초입쯤 온 것 같다.
팜플로나에 들어섰다 해도 올드타운에 있는 숙소까지는 1시간이 넘게 더 걸어가야 한다. 도시에 들어서니 갑자기 빠르게 발이 아파온다. 마리오와 함께 걸을 땐 몰랐는데, 아마 오늘 오버 페이스 한 것 같다.
보이는 벤치마다 쉬어 가야 할 정도로 몹시 힘들고 지쳤다.
그러다가 막판에 기운이 난 것은 폴란드인 C를 만나면서다. 앞에서 걷던 그가 나와 속도가 맞춰진 걸 보니 그도 엄청나게 지쳤던 모양이다.
"팜플로나는 황소 축제로 유명하잖아. 알고 있어?"
"아 그래? 몰랐는데."
"어 야 황소, 황소 알지? (손가락으로 뿔을 표현) 빨간색에 흥분하는 황소들이랑 사람들이 싸우고 달리고 하는 축제(산 페르민 축제) 있잖아. 그거 여기서 열리는 거야. 사람이 다치고 죽기도 한데. 엄청 무서워. 요즘엔 동물 학대라는 얘기도 있긴 한데. 한 나라의 전통과 문화이니 뭐라고 하기도 어렵고. 황소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목까지 가려지는 모자를 쓴 C는 영어를 아주 잘했다. 그리고 아는 것도 말도 참 많았다. 덕분에 무지했던 나는 팜플로나가 스페인의 산 페르민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C는 한국에 대해서도 좀 알고 있었다. 일 때문에 대기업(삼*) 직원들과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인상적이었다고. 한국의 개고기 전통에 대해서도 슬쩍 물어왔다. 아직도 이런 질문을 하는구나 싶었지만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질문하는 것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다. 물론 싸우고 싶거나 못되게 굴려고 하는 말도 아니다. 이 사람은 아마 나의 반응이 궁금했겠지. 아마도 만만해 보이는 나에게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너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까지는 보양식으로 가끔 드셨다, 우리 세대나 요즘엔 먹는 사람은 거의 없고 식당을 찾기 힘들 정도로 사라지고 있는 전통이다, 어느 나라 전통이던 시대에 맞게 변하고 사라지고 그런 거 아니겠냐.
영민한 C는 금방 알아듣고 화제를 돌린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발의 통증이 분산되는 듯했다. 참 신기하다. 못 걸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팜플로나 올드타운까지 오다니. 확실히 혼자 걸을 때보다 시간이 빠르게 간다.
올드타운은 마리오 말대로 아름다웠다. 오래된 건축물과 좁은 골목들 사이로 화살 같은 뜨거운 스페인 태양이 거침없이 내리꽂힌다.
괜찮으면 세탁기 같이 돌릴까?
공립 알베르게 앞에 순례자들이 줄을 서 있다. 대충 세어보니 10~15명 정도 된다. 거의 맨 앞에서 마리오가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침대 120개가 넘는 대규모 알베르게에 15명 안으로 도착했다니! 행여나 늦을까 봐 노심초사했던 시간들이 다 민망해졌다. 맙소사. 나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한 거니?
12시 알베르게 오픈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데 뒤로 동양인 남녀 두 명이 선다. 아담한 체구에 짧은 머리를 한 여자는 피레네산맥과 론센스바예스 알베르게 자판기 앞에서 본 적이 있다. 곱슬머리를 한 남자도 론센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침대를 배정받기까지 또 다른 30분이 걸렸다.
막바지 1분을 남겨두고 우리는 인사를 나누게 된다. 아담한 체구 여자는 메그, 곱슬머리 남자는 Y. 둘 다 일본인인데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니고 론센스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걸었다고 한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세탁기 앞에서였다.
보통 2~3유로 정도 하는 세탁기가 공짜라고 하니 사용해 볼까 싶어서 서둘러 씻고 나갔다. 다행히 줄이 없었고 내가 줄을 서자 금방 내 뒤로 줄이 길어졌다. 타이밍이 좋았다 생각하고 있는데 메그가 줄을 섰다가 포기하고 손빨래 쪽으로 가는 게 보인다.
순간 내가 그녀를 불렀다.
"나 세탁물 이거밖에 없는데, 너만 괜찮으면 같이 돌릴까?"
깔끔한 성격은 싫어할 수도 있다.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그럼 나는 좋지. 고마워!"
예상과 달리 단번에 고맙다며 활짝 웃는다.
20분 뒤, 세탁기가 다 돌 때쯤 메그와 다시 만났다.
여기 뒤뜰은 아주 넓고 근사했다. 빨랫줄도 있고 지친 순례자들을 위한 의자도 있다.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는 듬직한 나무도 있었다.
우리는 빨래를 널고 거기 의자에 앉았다.
까미노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어디까지 걸을 예정이며 며칠 정도 생각하고 왔는지, 언제 돌아가는지 등 대화를 나눈다. 서로 까미노에서 사용하는 앱이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내일 일정을 함께 짜게 되었다. 다행히 일정이나 여러 가지 의견이 잘 맞았다.
우리는 각자 볼일을 보며 편히 쉬었다가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유심을 구하느라 생각보다 타운을 많이 걸어 다녔다. 아오 오늘 진짜 뜨겁고 힘들다. 도시 구경이고 뭐고 더는 못 걷겠다. 돌아와 침대에 뻗었다.
시에스타가 풀리는 시간쯤 메그가 내 침대로 찾아왔다. 저녁 식당도 찾아볼 겸 타운도 둘러보러 나가자고. 그렇게 또다시 팜플로나 골목을 돌아다녔다.
서로 아직 안 친하고 몰라서 배려하느라 힘들었던 메그와의 첫 산책. 그녀와 나는 둘 다 주장이 강하지 않고 상대방을 맞춰주는 편이라 식당을 고르는 데 꽤 애를 먹었다. 1시간 반을 같은 곳을 돌다가 결국 메뉴델디아가 있는 한적한 식당에 들어갔다. 내 발과 무릎은 더 걷기 힘든 만큼 아팠지만 메그는 이상하게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우리의 대화는 솔직하고 편안했다. 마음에 있던 말들이 툭툭 나오는데 그게 서로 공감이 되고 마음이 잘 맞았다. 초면에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고 선을 지킬 줄 아는 그녀가 나는 좋았다.
"까미노에도 여럿이 무리 지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나는 아닌 것 같아."
"맞아. 나도 어렸을 때는 사람 많은 게 좋았는데, 지금은 혼자라도 괜찮아."
서양인을 좋아하고 여럿이 다니는 걸 좋아하는 인싸 중에 인싸 Y와는 에너지가 달라 조금 힘들었던 모양이다. 독립적인 그녀는 나와 비슷한 지점이 있었다.
"내일 같이 출발하지만 서로 걷는 속도는 다를 테니 같이 걸으려 애쓰지 말자. 내가 엄청 늦거든."
"그래 숙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 내가 천천히 걸어도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메그는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라고 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녀는 빨리 걷는 순례자 중에서도 선두를 유지할 만큼 잘 걷는 사람이었으니..)
물을 달라고 했으나 탄산수를 (심지어 달달한) 주는 곳. 샐러드에서 왕소금이 씹혔지만 땀을 많이 흘린 순례자들을 위한 것이지 않겠냐며 우리는 웃어넘겼다.
나는 그녀와 얼마나 더 걷게 될까? 우리는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상관없지 뭐.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돌아와 잘 준비를 하는데 화장실에서 프랑스 친구 G를 만났다. 이틀 연속 길에서 보다가 오늘 못 보았다고 이렇게나 반가울 일인가. 활짝 웃는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녀도 나도 서로의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또 까르르 웃었다. 결국 서로 이름을 핸드폰에 적어준다. Gertrude. 스펠링을 보면서 몇 번 따라 해 보라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도 그랬다.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는 평이 꽤 좋은 편이다. 일단 건물 자체가 분위기 있고 크고 천장도 높다. 론센스바예스처럼 각국의 수많은 순례자가 모이는 곳이니 어울리기도 좋다. 어울리기 좋아하는 Y는 늦은 시간까지 맥주를 마시다가 왔다고 만족해했다.
단 하나 놀랐던 것은 화장실이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일 이곳에 머물고 가다 보니 변기 커버가 자주 깨지나 보다. 더더욱 남녀 공용 화장실이라 커버를 수도 없이 내렸다 올렸다 했겠지. 얼마나 자주 깨졌는지 변기에 커버가 아예 없었다.
사람들은 난감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오곤 했다. 하지만 커버가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이를 문제 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일상이었다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을 일들을 앞으로 매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고난이 새로운 경험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점(아직 3일째)이다.
쉴 수 있는 근사한 중정과 무료 세탁기, 많은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이런 분위기의 알베르게에서 화장실 따위 아무렴 어때. 암.
…하지만 이날부터이다. 생애 첫 변비가 시작된 것은;;
Bonus!
팜플로나 알베르게 : Albergue Jesús y Marí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