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걱정했던 일들은 대부분

Roncesvalles - Zubiri

by OHz 오즈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6 am. 통증이 여전한 무릎을 겨우 일으켜 세우고 미간을 찌푸린 채 침대를 내려온다. 사다리에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찌릿찌릿 아프다. 그래도 어제 갑자기 열이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휴.. 이 정도 몸컨디션은 감지덕지 더 바랄 것도 없다.

어제가 별 5개 "빅 데이(Big day)"였다면 오늘 수비리까지는 별 3개 정도 되는 난이도라고 하니 이것쯤이야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퉁퉁 부은 몸을 이끌고 씻고 짐을 꾸린다.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다. 오늘 입을 옷은 어제부터 이미 입고 있으니까. 나는 기능성 긴팔과 바지를 각각 2벌씩 챙겨서 매일 한 벌씩 빨아가며 번갈아 입을 예정이다. 내일 옷을 자연히 오늘 입고 자게 되니 정신없는 아침에 번거로움도 줄이고 시간도 아낄 수 있어서 아주 좋다.

여분의 옷으로는 샤워하고 바로 툭 걸칠 수도 있고 기분도 낼 수 있는 박시한 롱 티셔츠+속바지를 원피스겸용으로 챙겼다. 이 외 방한에 대비할 수 있는 바람막이 재킷과 아주 가벼운 패딩이 배낭에 있다.


양말은 이너로 얇은 발가락 양말을 신고 그 위에 울 양말을 신는다. 이것도 두 짝씩 가져왔는데, 어랏? 발가락 양말 하나가 안 보인다? 그러고 보니 배낭 커버는 또 어디로 갔지?

맙소사. 단 하루 만에 몇 개를 잃어버린 거니.. 눈이 질끈 감기고 나도 모르게 머리를 콩 쥐어박을 뻔했다. 정말 정신이 없긴 없나 보다. 정신을 차리자는 의미로 깊은 한숨을 뱉는다.



조식 먹는 건물은 건너편에 있으니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배낭을 챙겨 나왔다. 밖은 아직 어스름한 새벽이구나. 공기가 차고 상쾌하다.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저쪽 아래 문을 통과하며 벌써 길을 떠나고 있었다.


조식 테이블은 이미 세팅이 되어있었다. 가장 큰 원형 테이블로 안내받아 다른 순례자들과 차례대로 앉는다. 나의 오른쪽은 스페인어(로 추측되는)가 가능한 사람들이 아침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왼쪽으로는 옆 침대에 있었던 미카엘과 올리가 막 도착했다.


어제 전등 꺼줘서 고마워. 오늘 어디까지가? 수비리 알베르게에 예약은 했어?


오늘 아침 테이블의 가장 핫한 이슈는 다음 목적지인 수비리(Zubiri)알베르게에 관한 것이다. 팬데믹 이후로(?) 까미노에 순례자들이 몰리면서 알베르게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는 것이다. 예약하지 않고 그때그때 발이 닿는 곳에 가서 머물렀던 평화로운 까미노가 이제는 예약해야 원하는 곳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순례자들에게 은근한 스트레스가 되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도 나는 맛있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 커피와 주스, 빵과 사과가 있는 단출하지만 충분한 아침식사다. 특히 커피가 진하고 아주 맛있었는데(약간 베트남 커피 같은 느낌이랄까?) 이후 스페인 그 어느 곳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취향에 맞았다. 미처 먹지 못한 사과와 디저트 빵은 비닐에 싸서 배낭에 넣는다. 이거면 오늘 간식을 따로 사지 않아도 되겠다.


벌써 날이 밝았다. 떠나려는데 계단에서 어제 만난 친구를 만났다. 숙소 체크인할 때 내 앞에서 순서표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친구, L이다. 네팔 사람인데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L은 스페인어도 조금 할 줄 알아서 어제 도움을 받았었다.


밝고 에너지 넘치는 이 친구와 말을 좀 많이 하게 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8시가 다 되어서 정말 떠나려고 보니 남은 순례자들이 거의 없다.

어제는 선발대였는데 오늘은 후발대로구나.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은 급한데 론센스바예스는 쉽게 떠날 수 없는 곳이었다. 어제 못 들어간 작은 교회도 들어가 보고, 산티아고까지 몇 킬로 남았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에서 사진도 찍어야 한다. 여명이 깔린 수도원이 아름답고 아쉬워서 자꾸만 멈춰서 뒤돌아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가다가 장갑 한쪽이 없어진 걸 알게 되어 다시 교회까지 되돌아가는 불상사도 벌어졌다. 오늘은 정말이지 출발이 많이 늦었다.


어제와 다른 점은 어제 만난 사람들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피레네산맥에서 만났던, 까미노에서 만난 유일한 아프리카계 순례자 G를 오늘도 만났다. 무심했던 어제와는 달리 눈빛으로 수줍게 아는 척을 하는데 이게 뭐라고 힘인지 신인지가 마구 난다.

까미노는 이런 즐거움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자꾸 이렇게 마주치다 보니 서로를 보는 눈빛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혼자 걷다 보니 혼자인 사람들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다. 서로의 안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눈빛들. 어제 본 너를 오늘도 만나면, 아 너도 여기까지 왔구나 잘했다 참 다행이야, 막 안심이 되고 응원하고 싶은 나 같은 너.


반려견들과 함께 걷는 순례자들, 자전거 순례자들, 혼자 걷는 사람, 함께 걷는 사람들, 10대 아들과 온 아빠, 엄마와 함께 온 딸. 그렇다. 9월의 까미노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순례자가 걷고 있었다.


세상 대표 겁쟁이 내가 순례길을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 하나, 비행기(죽을까 봐;) 둘, 사람이 없을까 봐(혼자 걷는 길은 무섭다. 특히 개) 셋, 화장실(과민성대장그거임).

헌데 비행은 무사했고, 길에는 앞뒤로 사람이 있을 때가 없을 때보다 훨씬 많다. 화장실은 수분과 먹는 게 부족하니 오히려 변비가 걱정되기 시작할 정도다.


눈치가 빠른 편인 나는 까미노 이틀 만에 깨닫게 되었다. 걱정했던 일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고 계획했던 것은 대부분 이루지 못한다는 걸. 그저 새로운 일들로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또 다른 하루가 어김없이 올뿐이다.




구름이 많았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드디어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을 만나게 되었다. 이 정도의 태양이라면 내일부터는 좀 일찍 나와서 뜨거운 시간대는 피하는 게 최선이겠다. 지쳐 쉬고 싶을 때쯤엔 그래도 문 연 바들이 시기적절하게 나타났다.


얼음과 함께 나오는 착즙 오렌지주스는 새콤달콤 찐으로 맛있다. 여유롭게 마시고 싶었는데 달콤함 때문인지 벌들이 자꾸 몰려와서 무섭고 신경이 쓰였다. 한국에 비해 모기나 파리 같은 다른 벌레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유독 벌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바에서 쉬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괜히 실감해보고 싶어 프랑스길 지도 전체 보기 해서 현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잘하겠지 이런 자신감은 없지만 저기까지 갈 거라는 믿음은 있다. 나는 스스로 중간에 포기할 리는 없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언젠간 도착할 것이다. 아직 길 초입에 있는 핀을 보니 둥둥 떠다니는 외로운 부표 같기도 했다.


마지막 내리막길은 정말이지 명성만큼 힘들었다. 가뜩이나 어제 막판 내리막길에서 무릎이 많이 상했는데 오늘도 연달아 심각한 내리막길 이라니. 마구잡이 큰 돌들이 박혀있는 이런 길은 정말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길이다. 천천히 내려가야지 하는 머리와 달리 몸은 쉽게 속도를 줄이지 못한다. 아.. 내 무릎과 발바닥..





다행히 알베르게가 마을 초입에 있었다. 저기 3층 발코니에 빨래를 너는 익숙한 얼굴, 세종 선생님이다. 선생님! 저 왔어요오-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조용한 일요일 마을을 시끄럽게 할 순 없었다.


나는 3층 4인실 중 침대 하나를 배정받았다. 당장 어디 앉아서 쉬고 싶지만 씻고 빨래까지 해야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빨래까지 다 마치고 배가 너무 고파와 마을을 돌아보는데 어? 왜 식당이 문을 다 닫았지? 일요일이라 그런가? 아차차, 이게 그 시에스타라는 거구나! 4시부터 두세 시간 동안 온 마을이 문을 닫는단다. 나는 4분을 늦게 나와서 밥도 못 먹고 오늘도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든다.


점심을 못 먹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에스타 때문에 점심을 놓친 순례자들이 꽤 있었다. 서로 억울한 표정으로 견과류 같은 걸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같은 알베르게의 세종 쌤들과는 좀 이른 저녁에 '메뉴델디아'라는 것을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다. 선생님이 알아본 식당이 조금 떨어져 있어서 사부작 걸어가기로 했다.





6시쯤 도착했지만 식사 주문은 7시 이후에나 가능했다. 음료만 마시며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니! 배가 고파 갑자기 정신이 어질.

예전에 스페인 친구가 자기들은 저녁을 보통 9시에 먹는다고 했는데 그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었어!


메뉴델디아라는 것은 3단계 코스 요리인데 10~15유로 정도로 가성비가 좋아서 순례자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다. 첫 번째는 수프나 샐러드, 라이스, 파스타 같은 엔트리 요리 중에서 고를 수 있으며 고기나 생선 중심의 메인요리가 두 번째로 나온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나 요거트 같은 디저트까지. 우리는 3명이니 조금씩 다른 메뉴를 시켜서 나누어 먹는 기지를 발휘했다. 후후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인데 이상하게 이분들에게는 초면에 자꾸 애교를 부리게 되었다. 그래도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녁밥도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사실 얻어먹을 나이는 아닌데요 하며 뻘쭘해하니 에이 그런 나이가 어딨어요 하고 웃으신다.


발랄한 소녀미가 넘치는 아내와 그런 그녀를 허허하고 웃으며 바라보는 남편. 부부가 순례길을 같이 걸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지 않은가. 좋은 어른들과 함께 좋은 저녁을 먹었다.


나의 까미노 첫 친구, 선생님들 여전히 잘 걸으면서 건강히 지내시죠?


침대에 올랐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고 일정을 되짚어 본다. 한국을 떠나온 지 4일째, 이제 더 이상 예약한 숙소는 없다. 내일은 예약받지 않고 도착 순서대로 침대 배정을 해주는 팜플로나의 공립 알베르게로 간다. 늦게 도착하면 침대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 몇 시에 출발해야 안전한지 가늠이 되지도 않지만 최대한 일찍 출발해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무릎이 조금 나아졌기를, 발도 회복되고 보호대에 짓눌려 뻘겋게 올라오기 시작한 피부도 가라앉기를.

정신없는 모든 것이 조금씩 나아지기를, 그렇다고 낯섦 들이 너무 또 빨리 익숙해지지는 않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한다.





Bonus!

수비리 알베르게 : Albergue Río Arga Iba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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