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코끼리를 냉장고에 어떻게 넣어어어
어릴 적 수련회나 수학여행 전날 가방을 쌀 때도 그랬다.
가방은 요만한데 가져가야 할 것들은 이따만해서 마치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어야 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요리조리 싸 보지만 금세 가방은 빵 터질 것 같은 공처럼 부풀어 오르기만 할 뿐.
도저히 안 되겠다 반 포기상태로 지쳐있을 때쯤 아빠가 빼꼼 들어오신다.
"아빠, 이거 다 가방에 다 안 들어가. 어떡해?"
그러면 아빠는 사뭇 심각하게 가방을 스캔한 다음,
"글쎄, 이거 충분히 다 들어갈 것 같은데? 아빠가 한번 해볼게."
그러고선 아주 차분하고 큰 손으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셨다.
그날 아빠의 요술 같은 손이 자꾸만 생각나는 순례길 배낭 싸기. 아마도 모든 순례자의 미션 넘버 원.
산티아고 순례길의 비밀 미션은 까미노를 걸을 때부터가 아니라 까미노를 준비하고 배낭을 싸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배낭은 자유의 상징
관건은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얼마큼 가볍게 싸는가인데, 이게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기본적으로 순례길에 필요한, 침낭, 우비, 기능성 옷, 등산화, 스틱 같은 것들은 대부분 사야 했다. 살 게 많으니 가성비 좋은 것을 찾다가 데카트론이란 곳도 알게 되었다. 평생 갈 일 없을 것 같던 종로 5가의 아웃도어 매장에 처음 들어가 쭈뼛거리며 배낭을 고르던 때도 있었다. 기능성에 패션까지 더해진 옷을 찾아 삼만리. 참 여러 브랜드를 거치기도 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사고 또 오매불망 배송만을 기다리는 내 모습에 언젠가는 헛웃음이 나오기도 할 것이다.
수십 가지 내가 필요한 것 중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배낭에 테트리스처럼 넣어 보고, 또 매보고 걸어도 보고 무게도 달아보고. 어느 부분에서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건 중요하다. 수량을 줄이거나 아예 포기도 해야 하는 선택과 결정의 과정도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보다 깊게 일상을 돌아보게 되는 게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낭을 꾸리며 철학적 사유와 의미를 발견하곤 한다. 배낭의 무게가 욕심의 무게라든지, 업보이자 삶의 무게라든지.
미니멀리스트 같은 간소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좋은 비유고 훌륭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나의 배낭은 그렇게 무겁지도 또 그렇게 가볍지도 않았다. 아마 예전 올레길을 걸으며 배낭 메는 법, 필요한 것, 필요 없는 것 등 감을 좀 잡은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배낭은 욕심이나 삶을 되돌아본다기보다 보살피고 의지가 되는 언제나 함께할 애착의 대상에 가까웠다. 내가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자유를 상징하기도 했다. 이거 하나면 어디서든 든든할, 그런 배낭을 꾸리고 싶었다.
떠나기 전날까지 고민하게 되는 순례길 미션 넘버 원, 배낭 싸기. 그 승패 없는 미션을 충분히 즐기고 무사히 완수하게 되기를.
순례길 나의 배낭 속
순례길의 배낭은 순례자들의 개성만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배낭도 완벽한 것은 없고 완벽할 수도, 완벽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개성 있는 배낭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면서 걸어갈 뿐이다.
걸으면 금방 알게 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것만은 꼭 필요해'
이런 건 세상에 없다는걸.
정말이다.
...
(하.. 하지만 립밤은 꼭 있어야.. 아... 장갑이랑 샌들도.. 에 또... 쿨룩)
+ Bonus
<순례길 나의 배낭 속>
1) 배낭 36L #오스프리
2) 침낭 #데카트론 #초경량680g (300g대의 라이너침낭과 마지막까지 고민했음)
3) 기능성긴팔2, 기능성긴바지2, 원피스1, 속바지1, 속옷 각각2, 울양말2, 발가락양말2, 얇은양말1
4) 초경량패딩, 아디다스 재킷
5) 우비 #데카트론 #퀘차
6) 샌들 #휠라, 등산화 #미드컷 #블랙야크
7) 스포츠타월
8) 크림, 도브 비누 2/3조각(샴푸, 바다워시, 세수 올인원가능), 클렌징, 클렌징오일, 선크림, 썬스틱(안 쓰고 안 버림), 칫솔, 치약, 바셀린, 면봉
9) 버프, 마스크, 무릎보호대, 장갑, 헤드랜턴, 모자, 스카프, 스틱
10) 고프로10, 보조충전기 #10000mah , 각종 충전기
11) 각종약품(타이레놀, 마데카솔, 소염진통제, 지사제, 종합감기약, 코로나대비감기약 등), 코로나셀프테스트기, 영양보조제(유산균, 비타민, 프로폴리스)
12) 장바구니, 손톱깎이, 실, 바늘, 옷핀2, 귀마개, 머리끈, 눈썹펜, 아이라인펜
13) 보조가방과 그 안에는 여권, 유로, 카드 #트레블월렛, 휴대폰, 선글라스, 립밤, 핸드크림, 손소독제(소량)
14) 기타 : 이어폰, 종이세제(소량), 지퍼백, 비닐, 휴지, ++매일 사는 물과 간식은 덤
*까미노 중에 버린 것 : 손소독제
*까미노 중에 추가 구입한 것
- 비누, 치약, 크림, 립밤, 비타민 : 소량만 가져가서 다 쓰고 현지에서 삼
- 기모 레깅스, 플리스 조끼 : 갈수록 추워져서(9월 초~10월 초 순례길) 레온 데카트론에서 구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