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남은 게 없다
상사는 무섭다. 호통을 치고 화를 내서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권력 구조에서 나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무섭다. 상사가 내 문서에 결재를 안 해주고 어깃장을 놓으면 답이 없다. 아무리 문서를 잘 써가도 상사가 “나는 이해 안 돼서 못 찍어주겠는데?” 하면 그만이다. 비위 맞추고 살살 달래는 수밖에 없다. 일을 왜 이따위로 해왔냐 혼내면 납작 기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회사에서나 상사지, 밖에 나가면 아저씨나 아줌마일 뿐이다.’
나 역시 회사에서나 직급으로 불리지, 밖에서는 그냥 애 엄마다. 과장까지는 운이 좋아 진급 누락이 없었는데, 차장 달기는 쉽지 않았다. 어차피 진급한다고 월급이 확 뛰거나 대우가 확연히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직급은 큰 의미 없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어도 몇 번 떨어지고 나니 의기소침했다. “과장님”이라고 나를 부르던 후배들은 자신들이 차장이 된 다음에 나에게 차마 과장이라고 못 부르겠는지 호칭을 생략하곤 했다. 의연하게 굴려 해도 의연하지 않았다. 종국에는 집에 와서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삼키며 ‘엄마는 회사에선 루저인데 너희들한텐 좋은 엄마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과장 때 명함이 다 떨어져서 과장 명함을 한 통 새로 신청했는데 코로나로 재택근무로 전환되고, 외부 미팅도 거의 없어져 명함을 쓸 일이 없었다. 차장으로 진급하고 과장 명함을 통째로 버리면서 느꼈다. 명함 쪼가리는 그냥 휴지 조각이구나. 차장 진급 후 받은 명함도 휴직하면서 쓸 일이 없어졌다. 같은 부서로 복직하지 않는 이상 이 명함도 휴지 조각이 되겠지.
워킹맘에게 남은 것은 명함과 직급이 아니었다. 회사 밖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