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보니까 동남아에서 한 달 살기 많이 하던데, 너 휴직하는 동안 애들 데리고 갔다 오는 거 생각해 봐.”
올 추석에 시어머니가 갑자기 '한 달 살기'라는 말을 꺼냈다.
코로나 전에 아이 친구 가족이 사이판이나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를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가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때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1주일 휴가 내는 것도 큰맘을 먹어야 가능했기 때문에 당장 실현 가능한 목표는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휴직을 냈을 때는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으므로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이제 코로나가 한풀 꺾여 슬슬 해외여행을 가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데도 나는 해외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막상 오랜만에 실행하는 일이 계속 망설여졌다. 코로나 기간 위축된 건 사회 분위기만이 아니었나 보다.
한창 위축되었던 내 마음이 어머님의 한마디로 뛰기 시작했다. 다시 없을 이 휴직 기간 동안 우리는 무조건 해외 한 달 살기를 해야 한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부리나케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장소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였다. 나는 추우면 마음이 쪼그라들고 무기력해지는 사람이다. 올겨울은 유달리 추울 것이라 하니, 더운 나라에 가서 활기를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남아시아라고 겨울에 다 따뜻하진 않다. 적도에서 거리가 꽤 떨어진 곳은 겨울에 춥다고 한다. 한국만큼 추운 것은 아니지만 으슬으슬하게 추워서 수영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아이들이 매일 수영하기 위해 더운 날씨는 필수다. 다음으로 요즘 달러 환율이 너무 높은 점을 고려하여 괌, 사이판 등 미국령은 제외했다. 그리고 치안이 안전하고 영어를 사용하기 편한 곳 등등의 조건을 따지자 결국 남는 것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는 몇 차례 출장과 여행으로 가본 적이 있다. 깨끗하고 안전한 데다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느낌이 좋아서 한 달 살기 목적지를 싱가포르로 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보다 물가가 비싸서 한 달을 생활하기에 망설여졌다. 유학원에 문의해보니 싱가포르는 벌써 마감되었다고 하여 한 달 살기의 목적지를 말레이시아로 정했다.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 머문다면 싱가포르와 가까워서 편하게 다녀올 수 있겠지만, 우리는 목적지를 쿠알라룸푸르로 정했기 때문에 싱가포르는 이번에 방문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한 달 살기의 모든 과정을 유학원을 통해 알아보고 결정하였다. 중개업체인 유학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검색하고 예약한다면 비용 절감이 가능하겠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한다. 게다가 내가 평소에 그 방면에 지속적 관심이나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원을 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약 2~3주일 동안 동남아 한 달 살기를 검색한 후 신뢰할 만한 유학원을 골라 연락하였다. 유학원의 설명을 듣고 관련 자료를 받아 살펴보고 아이들이 영어 공부할 어학원과 숙소를 선택했다.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의 윤곽이 대충 나왔다. 남편과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를 가자는 것에는 합의가 된 상황이었고, 이제 아이들의 학교와 숙소 및 예상 비용 등 내가 알아본 사항을 남편에게 공유할 차례였다. 사실상 나의 남편은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편이라 - 특히나 이런 해외여행 방면으로는 더더욱 - 남편이 반기를 들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큰 비용이 드는 일이라 혹시 이것저것 까다롭게 물어보지 않으려나 했는데, 역시나 남편은 숙소에 방이 몇 개인지, 수영장은 있는지, 아이들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수업하는지, 숙소와 학비는 얼마인지 등 간단한 질문만 한 후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와! 세상에! 1안, 2안, 3안 없이 단일 안만 준비했는데 바로 결정이라고? 이 유학원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다른 유학원은 없었는지, 학교며 숙소며 괜찮은 곳인지, 비용은 적합한지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회사에서 일할 때는 A 업체의 1안, 2안, 3안, B 업체의 1안, 2안 3안 등등 많은 대안을 조사해야 했다. 1안은 가끔 1-1안, 1-2안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또한 근거 자료도 충분히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내 딴에는 충분히 조사하여 보고를 올려도 결재권자들로부터 꼼꼼하고 깐깐하고 때로는 비판적인 질문을 들었다. 그렇게 하여 금방 의사 결정이 되면 다행이지만, 추가 조사를 해야 할 때는 죽을 맛이었다. 물론 기업에선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결정을 하기 위해, 또한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러나 때로는 제때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보고를 위한 보고 자료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또한 조사해 간 자료가 유야무야 쓸모없이 묻힐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삽질만 하는 일꾼 노릇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한 달 살기는 자료 조사부터 의사 결정까지 다 내가 할 수 있다. 남편은 전문가인 나에게 (우리 부부 중 굳이 전문가를 꼽자면 내가 전문가) 결정을 일임하고, 그 결정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는다. 믿고 지지하고 동참한다. 내가 의사결정권자라니 진짜 좋다. 일할 맛 난다! 그 덕분에 나는 계약금을 홀가분하게 (사실은 손을 약간 떨며) 송금할 수 있었다.
참, 아이 친구네도 이번 겨울에 해외 3주 살기를 간다고 한다. 아이 친구 엄마는 처음에 베트남 푸꾸옥을 가려고 알아봤었는데 필리핀 보홀로 목적지를 바꿨다. 아이 친구 아빠한테 푸꾸옥에 대해 얘기했더니 숙소, 비행기, 기타 등등에 대해 매우 깐깐하게 태클을 건 모양이었다. 남의 남편 흉보기도 그렇고 하여 “언니 힘들겠다."라고 한 마디만 던졌더니 그 엄마가 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