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주말마다 여행을 다니는 역동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여행을 갔다 온 지 몇 달이 되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이다. 여기저기 여행지를 검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견물생심이란 말도 여기에 적용되는 건지, 그렇게 검색하다 보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 나는 물욕은 별로 없는 편이라 물건 사고 싶어 마음이 드르렁거리는 사람들에게 공감이 잘 안된다. 그러나 여행에 있어서는 다르다. 남편과 자식이 없었다면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이 더 잦았을 거다, 아마도.
여행을 결정하고 나면 그다음부터 바로 고뇌가 시작된다. 바로 ‘짐싸기싫어병’ 때문이다. 기왕 해야 하는 거 즐겁게 하면 될 텐데 단 한 번도 즐거운 적이 없었다. ‘짐 싸야 하는데 짐 싸기 싫어’라는 마음의 소리를 백 번쯤 외치면서 과거의 나를 꾸짖는다. ‘도대체 어쩌자고 여행을 간다고 했어? 이제라도 여행 취소할까?’
결혼 전에 나 혼자일 때도 짐 싸기가 싫었는데 이젠 아이들의 짐까지 챙겨야 한다. 나는 내 짐(옷가지와 화장품, 기타 등등)과 아이들의 짐(마찬가지로 옷가지와 화장품, 기타 등등), 우리 가족 물놀이용품(수영복과 수모, 수경, 아이들의 튜브, 구명조끼 등), 비상식량을 챙기고, 남편은 남편의 짐과 전자제품(노트북, 태블릿, 핸드폰 충전기 등), 구급약을 챙긴다. 딱히 정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역할이 그렇게 정리되었다. 내가 먼저 며칠에 걸쳐 내 짐과 아이들의 짐을 싸놓으면 남편은 막판에 자신의 짐을 넣고 가방을 닫는다.
그동안 여행 짐을 쌀 때는 준비물 리스트를 작성하지 않고 철저히 내 머리에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만 바빴다. ‘이거 까먹지 않게 가져가야지. 맞다, 저것도 까먹지 않게 가져가야지.’ 그렇다고 생각나는 짐을 바로 챙기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항상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할 일이 많았다. 다른 할 일을 하면서 그저 ‘잘 기억해야 해.’라며 머리만 채근했다. 며칠 동안의 여행에 필요한 짐은 그렇게 해도 감당이 가능했다. (사실 그래서 빠뜨리는 물건들이 꼭 있었다.)
이번은 한 달이라는 긴 기간의 짐을 싸야 했으므로 계획형 인간들이 한다는 준비물 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고백하자면 나도 MBTI 결과로는 J, 즉 계획형이지만 계획표나 체크리스트 작성은 질색이다.)
리스트 만들고 짐 챙기느라 용 썼다
파일을 만들기까지가 귀찮아서 그렇지, 막상 만들어 놓으니 편하다. 리스트대로만 챙기면 문제 없을 테다. 리스트 작성 후 추가로 생각나는 준비물은 언제든 추가하면 된다. 나는 준비물 리스트를 프린트하여 옷장에 붙여놓고 추가로 생각나는 준비물은 표 아래에 수기로 적었다. 먼저 챙겨놓은 짐은 동그라미를 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에 머리를 믿고 짐을 챙길 땐 내가 챙겼는지 안 챙겼는지 불확실해서 짐을 다시 들추는 일도 있었으나, 이번엔 그러지 않아도 됐다.
준비물 리스트로 ‘짐싸기싫어병’을 극복했냐고? 그럴 리가! 짐은 여전히 싸기 싫었다. 그동안은 일과 육아로 바쁜 가운데 짐을 싸야 해서 시간이 모자란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적은 시간을 쪼개어 짐을 챙겨야 했으니 짐 싸는 것이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웬걸. 휴직자도 짐 싸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캐리어를 꺼내며 한숨 한 번 쉬고, 옷장 깊숙이 넣어둔 여름옷을 꺼내면서 한숨을 또 쉬었다. 아니, 그냥 짧게 여행 다녀오면 짐도 적을 텐데 어쩌자고 내가 한 달을 가자고 했을까.
나는 왜 이토록 짐 싸기를 싫어할까? 그냥 내가 귀차니즘이 심해서일까? 그래도 그렇지. 그저 움직이기 싫어서라고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다. 짐을 싸려고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짐을 싸면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느낌이 든다. 나는 내가 짐 싸기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며칠 동안 고민해봤다. 그 결과 여행 짐 싸기는 환경이 바뀌는 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극대화되는 과정임을 알게 됐다.
아이들의 옷을 가방에 넣으며 그사이 아이들이 확 자라서 옷이 작아진 건 아닐지, 옷의 개수가 부족하지는 않을지 불안했다. 아이들은 최근에 급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달 전에 입던 옷을 못 입을 리 없고, 또한 옷을 대여섯 벌 싸가서 세탁하여 입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게다가 우리 아이들은 옷이 많아도 입는 옷만 입는다.) 또한 ‘생각보다 추워서 싸간 옷으로 못 버티면 어쩌지?’ 또는 ‘생각보다 더워서 싸간 옷으로 더우면 어쩌지?’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싸면서도 ‘음식이 모자라면 어쩌지?’ 또는 ‘음식을 많이 싸서 짐이 꽉 차면 어쩌지?’라며 걱정을 반복했다. 사실 남편과 나는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다. 외국 음식도 대체로 잘 먹는 편이다. 나는 유럽이면 유럽, 몽골이면 몽골, 현지 음식을 매 끼니 먹어도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김치나 고추장을 싸 가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 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니 달라졌다. 한식파 큰아이를 데리고 외국에 나가려니 걱정이었다. 동남아 음식은커녕 양식도 안 좋아하는데 이를 어쩐담. 컵반 양념과 김, 김치를 챙기면서도 아이를 굶길 것만 같아 노심초사했다.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없을까 봐 하는 걱정은 엄마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이 역시도 아이들 입맛에 맞는 식당을 찾거나 한국 식품을 사면 해결되는 일이다.
결국 해결 방안이 없는 고민이 아니었다. 짐 싸기가 싫은 이유가 나의 불안과 걱정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의식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출발 이틀 전이다. 짐을 많이 쌌는데도 계속 넣어야 할 물건이 생긴다. 남편은 아직 짐을 하나도 싸지 않았다. 남편에게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다가 낮에 “이제 짐 좀 챙겨야 하지 않아?”라고 슬쩍 말했더니 남편은 “챙길 거야.”라고 말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 본인의 옷가지만 몇 벌 넣으면 되는데 말이다. 피아노와 기타를 치는 남편을 보며 ‘그래, 한 달 동안 못 치니 실컷 쳐라.’라며 참았다.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남편에게 짐을 싸라고 말했더니 남편은 방금 설거지를 끝냈으니 쉬었다 하겠다고 한다. 남편의 옷이 있는 옷장이 있는 방에서 곧 아이들이 불 끄고 잘 시간인데! 게다가 출발 전날인 내일은 갑자기 시부모님을 뵙기로 하여 시간이 더 없었다. 참았던 나는 폭발하여 남편에게 화를 냈다.
“앞으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음에는 절대 자기랑 한 달 살기 안 갈 거야!”
남편은 미안하다며 후다닥 움직였다.
새로운 환경에 저항이 큰 남편은 어쩌면 나보다 더 불안하고 걱정되기 때문에 짐 싸는 게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불안이고 뭐고, 그냥 단순히 귀찮아서 짐 싸는 게 싫은 건가. 근본적으로 짐 싸기는 누구에게나 싫은 일이겠지. 이 지구상에 여행 짐 싸기 좋아하는 사람 어디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