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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훈 Mar 23. 2023

마조히스트들의 운동법

자학의 운동에 몰입하는 이유 : 웨이트 트레이닝과 러닝

통제불가능한 세상과 몸

  까뮈는 말한다, 삶은 부조리하다고. 노자도 말한다, 천지는 불인(不仁)하다고. 아무리 우리가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무심한 세상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굴러간다. 내가 아무리 좋은 뜻을 지니고 있더라도 상대방이 그 뜻에 호응하지 않으면 내 의지는 무용지물이 된다. 출생과 사망, 그리고 살아가는 것까지 내 의지대로 되는 것 하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앞에서 내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을 마주하며 우리는 한없이 무력해지고 삶의 부조리함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통제 불가능하고 무심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내 자신의 몸이다.


  처음은 내 팔다리 하나, 내 몸 하나 가누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내 몸인 이상 자꾸 쓰고 또 연습하다보면 결국 가눌 수 있게 된다. 몸을 통제하는 연습에 드는 노력은 세상을 통제하고자 할 때 들이는 노력보단 훨씬 적을 것이다. 결국, 내 몸은 이 통제 불가능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제 가능하고, 또 유일하게 내 의도대로 다룰 수 있는 도구이다.



 규율의 테두리안에서


  ᅠ몸을 쓰는 활동은 다양하고, 나는 그것을 크게 두 가지, 여러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 하에서 즐기는 활동과 기초체력을 기르기 위해 하는 활동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축구와 야구가, 후자는 웨이트트레이닝과 달리기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전자는 특정한 도구를 다루거나 누군가를 상대하는 활동이지만, 후자는 내 몸 자체의 통제력을 기르는 활동이다. 보통 후자는 전자를 보다 수월하게 해내기 위해 훈련의 수단으로 이용되고는 한다.

  영화 <아는 여자>에서 한이연은 동치승에게 투수가 공을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묻는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남기고 마운드 위에 서 있던 치승은 투수땅볼을 잡고, 이연을 위해 그 공을 1루가 아닌 관중석으로 던진다. 모두가 놀라고 감독의 표정은 굳는다. 그리고 치승은 아연에게 고백한다. 낭만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구공은 글러브를 향해 던져야만 하며, 공이 글러브에서 벗어날수록 그 공을 던진 선수의 가치는 떨어진다. 야구공은 야구장 밖으로 던질 수 없다. 야구나 축구 등의 활동은 규율을 벗어날 수 없다.



규율의 바깥에서 : 내 몸을 통제하기


  반면 훈련의 수단이던 웨이트 트레이닝과 달리기는 규율로부터의 해방구가 될 수 있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자학의 일종이다. 근육에 지속적인 부하를 가해 근육을 찢고, 영양분을 섭취하여 찢어진 근육을 다시 붙여낸다. 근육을 보다 효율적으로 찢고 다시 붙이기 위해 운동방법, 해부학, 의학, 영양학, 생리학 등을 공부한다. 타자의 몸을 보고, 그 몸과 나의 몸을 비교·대조·분석하며 내 몸의 현 상태를 이해한다. 신체에 대한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연구 내용들은 나의 몸에 맞게 개별화되고, 그것은 내 몸에 대한 구체화된 이해로 발전한다.


  웨이트 트레이닝에 틀린 자세는 있어도 옳은 자세는 없다. 각자의 신체구조에 맞게 역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자세를 찾아서, 쇠가 가하는 부하를 이겨내면 된다. 가장 효율적인 자세를 찾기 위해 수많은 부상을 당한다. 때로는 스스로 몸을 정말 ‘학대’한다. 휴식이 필요한 시기에도 휴식에 어려움을 겪는다. 몸이 쉬라는 신호를 보내는데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오버트레이닝’을 한다. 운동을 마치고 음식을 먹는다. 신체조성이 변한다. 때로는 영양소를 과하게 섭취하여 지방만 늘어나기도 하고, 너무 적게 먹어서 근손실만 일어나기도 한다.


  음식 섭취에 따른 신체조성 변화는 수개월 뒤에 관찰된다. 결과를 관찰하기까지 아주 지루하고도 통제된 삶을 살아야 하며, 관찰 결과에 따라, 영양섭취 방법을 바꾸고 몇 개월을 다시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웨이트 트레이닝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으로 배우는 운동이다. 또 몸으로 배우기 위해 몸에 극도의 통제를 가하는, 도를 닦는 과정이다. 그럼으로써 나를 알아가는,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위이다.


  달리기도 별반 다르지 않은, 역시 자학의 일종이다. 달리기는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활동이었고,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무의미한 노동이며, 고통스러운 행위를 즐기는 일종의 마조히즘이다. 오죽하면 트레드밀의 기원이 고문도구였고,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폐지되었겠는가.


  하지만 달리기는 무한한 자유도를 지닌다. “Just Do It!” 그저 신발만 신고 밖에 나가면 시작할 수 있다.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만 열면 가능한 ‘Door-To-Door’ 운동이다. 방향도, 장소도, 속도도,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하는 골목골목으로, 원하는 속도로, 발이 이끄는 대로 달리는 행위를 끊임없이 조정해나간다. 그저 밖으로 나가 원하는 길에서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만큼 뛰면 모든 운동이 끝이 난다.

  달리기는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일이다. 매 분마다 180번, 둔근과 대퇴근, 장요근과 비복근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지면을 밀어내 다리를 들어올린다. 글리코겐을 사용하여 움직인다는 것 외의 다른 큰 의미는 없으며, 글리코겐을 소진하는 단순 반복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달리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느낌을 받는다. 20분 가량 뛰다보면 고통은 사라지고 쾌감이 밀려온다. 기쁠 때, 슬플 때, 화날 때, 우울할 때, 감정이 들뜨고 머리가 복잡할 때 뛰다보면 어느 순간 잡념은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은 상당히 귀중하다. 뛰면서 맑아진 정신으로 세상과 나에 대해 고민한다. 달리기는 부조리한 삶을 직시하여 고통을 받아들이고 자유와 행복을 느끼게 하는 시시포스의 작업이다.



마조히스트들의 운동법 : 몸과 실존

  통제 불가능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것은 오직 나 자신의 몸이며, 이 몸을 통해 세상에 맞서나간다. 기초체력을 기르기 위한 운동들은 도구의 수단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본질적으로 내 몸을 통제하기 위함이며, 일종의 자학이다. 그러나 웨이트 트레이닝은 내 몸에 대해 이해하고 나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이며, 달리기는 극도의 자유를 통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여 부조리에 반항하는 실존의 방법이다. 운동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몰입되고 자유로워진다.




  운동을 하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세상을 보는 내가 달라졌을 것이다. 운동을 통해 만나는 나 자신은 반갑고, 운동하며 마주하는 세상은 아름다울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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