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샌디에이고
※ 알림: 이 글은 허구이며, 등장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졸업사진 찍을 때 입으려고 산 남색 원피스가 있었다. 허리 부분이 강조되고 밑단은 퍼지는 소매는 레이스로 된 원피스였다. 혹시나 차려입을 일이 있을까 싶어 가져왔는데 이런 일에 입게 될 줄이야… 하며 나는 뒷지퍼를 힘겹게 올렸다. 낯선 땅 미국 그곳에서 미국 남자와 첫 데이트를 하게 되다니 조금은 얼떨떨해졌다. 이별부터 졸업 그리고 미국으로 이사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단기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원피스를 사던 날 같이 집에 가던 길에 나를 보고 “원피스 입은 사진 찍어둘걸. 너무 예쁜데…”라고 말하던 전남자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이 잘 쭈그러들어 잡고 마시기가 불편한 생수를 손에 들고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노숙인 한 명이 카트를 끌고 지나가고 있었다. ‘좀만 더 기다렸다 나가야지…’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는데 어느덧 4시 30분이었다. 트롤리를 타면 올드 타운까지는 금방이었지만 약속 시간보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걸 선호하는 나는 급한 마음에 중고매장에서 산 크로스백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그때였다. 노숙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노숙인은 뭐라 뭐라 나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다들 쳐다보기만 할 뿐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겁이 나서 플랫슈즈를 신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어느덧 올드 타운에 도착했다. 카사 데 호세는 초입에 있는 멕시칸 레스토랑이었다. 금방 브라이언의 모습이 보였고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찔끔했다.
“일찍 왔네요? 나 많이 기다렸어요?” 브라이언이 말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숨이 차 보이는데 뛰어온 거예요?”
“그럴 일이 있었어요. 노숙인을 만나는 바람에…”
“저런! 항상 조심해야 해요. 다른 도시들에서 날씨가 따뜻한 샌디에이고행 버스 티켓을 편도로 끊어서 노숙인들한테 준대요.” 브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군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카사 데 호세는 약간 어두웠는데 노란 전등이 곳곳에 있어 은은하게 빛을 밝혔다. 벽에는 사막과 선인장 따위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라틴 음악이 흥겹게 흘러나왔고 이곳에는 슬픔 따위는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서려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브라이언과 비슷한 구릿빛 피부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하고 싶었던 질문을 브라이언에게 조심스레 던졌다.
“근데 브라이언, 문화적 배경이 어떻게 돼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문화적 배경이라뇨? 아 인종에 대해 묻는 거예요?”
“네, 실례가 안 된다면요.”
“맞혀봐요.”
백발에 구릿빛 피부, 쌍꺼풀 진 눈을 하고 있는 브라이언을 쳐다보았다. 샌디에이고 출신이니까 멕시칸인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묘하게 전혀 다른 인종 같은 모습이었다.
“멕시칸이에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하. 반은 맞혔네요. 나머지 반은 아마 못 맞힐 걸요?”
“혼혈이었군요.” 내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맞아요. 하프 멕시칸, 하프 아메리카 원주민이에요. 걱정 말아요. 이곳에서도 나는 이국적으로 생긴 사람이니까요.”
샌디에이고에 와서야 멕시칸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었는데 아메리카 원주민이기까지 하다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웨이터가 와서 메뉴판을 준비해 줬다. 브라이언은 나에게 테킬라를 마신 적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브라이언이 테킬라 샷을 일단 한 잔씩 마시자고 했다. 샷은 금방 나왔고 우리는 동시에 샷을 입에 털어 넣었다. 뭔가 독한 향이 났지만 약간 열매 같은 달달함도 느껴지는 맛이었다. 브라이언에게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머리, 염색한 거예요?”
“백발로요? 그럴 리가요. 원래는 검은 머리였어요. 이야기하자면 긴데, 난 오픈북이니까 다 말해줄게요. 우리 어머니가 원주민, 아버지가 멕시칸이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12살쯤에 우리를 버리고 떠났죠. 그때 나는 꼬박 일주일을 매일 울었고 눈물이 멎었을 땐 머리가 새하얘진 후였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유감이에요. 아버지랑은 아직도 연락 안 해요?”
“그 사람이 떠난 후 우리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상종하고 싶지도 않아요.”
브라이언의 옅은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가 떠나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스페인어를 더 유창하게 했을 거고 히스패닉 문화를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첫 데이트 치고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대화가 이어지게 될까 봐 내가 말을 돌렸다.
“지금이라도 스페인어를 배우는 거 어때요? 나도 프랑스에서 한 학기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어요.” 내가 애써 명랑하게 이야기했다.
“나도 가끔 스페인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싶다는 꿈을 꿔요. 비자가 된다면 간단한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그렇지만 못 가요.”
“왜요?” 순진하게 내가 물었다.
“나한테 아들이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