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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긍정 Feb 13. 2021

결혼 후, 천천히 가족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명절이야기

벌써 결혼한 지 10년, 시댁 식구들과 함께 20번의 명절을 보냈습니다.

열정은 넘치지만 무뚝뚝하고 살가운 사교성은 없는 저는 결혼 생활에 대한 걱정이 참 많았었어요.

그런 제게 남편이 요구했던 것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평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하지 말 것과 친정 부모님께 하는 것보다 과한 것은 하지 말 것.


8년의 연애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난 후 결혼을 했기에, 남편은 제가 열정이 끓어 넘치지만 오래가지는 못하고, 부모님과 매우 사이좋게 지내지만 먼저 부모님께 전화하는 일은 일 년에서 세네 번 정도인 무뚝뚝한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겠지요. 결혼 1년쯤 지난 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남편이 제게 뭘 하더라도 욕심내지 말고 평생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살자. 시부모님께 친정부모님보다 더 잘하면 그건 이상한 사람이다.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처음 결혼했을 때는 그랬습니다. 시부모님께 엄청 잘 보이고 싶었어요. 이런 좋은 사람을 낳아 길러주신 것도 감사했고, 몇 가지 이유로 저와의 결혼을 반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에게는 단 한 번도 직접 내색하지 않으신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잘 보여서 반드시 흡족한 며느리가 되고야 말겠다는 의욕이 넘쳐났어요.

돌이켜보니, 살면서 딱 4번 만나 뵈었던 분들과 갑자기 가족이 되었고,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과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서운함 그리고 시부모님께는 잘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섞이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직 뭘 많이 경험해보지도 못한 고작 30살의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요.


결혼하고 일 년 동안은 저와 시부모님 모두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 지금은 하지도 못할 여러 가지 일을 벌이곤 했어요. 저는 전남 나주까지 출장 가서 먹은 나주곰탕이 너무 맛있었어 즉흥적으로 6인분을 포장해 기차와 지하철을 갈아타가며 시부모님께 전달해드리는가 하면, 명절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락시장까지 가서 고기를 사다가 찜을 하고 전을 부쳐 시댁으로 가져다 나르기도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부지런함이죠. 갑자기 음식을 싸들고 시댁에 갈 때마다 놀라고 당황하시던 어머님 표정이 가끔 생각이 납니다.

물론 저만 유난스럽게 뭔가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결혼하고 난 후 시댁에는 갑자기 없던 행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 차례, 명절에 친척집 방문 등등.. 8년의 연애 동안 남자 친구가 명절에 본인 가족들끼리 외식하는 것 이외에는 제사, 차례, 친척집 방문 등이 거의 없고 단출하고 화목한 명절을 보낸다는 것을 16번을 거쳐 확인했었는데, 결혼을 하니 갑자기 제사, 차례 그리고 친척 방문이 생겨나자 저는 굉장히 당황했고,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일에 짜증이 솟구치기도 했습니다. 시부모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따르긴 하긴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기도 했고 짜증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갑자기 생겨난 시댁의 명절 행사들이 저를 골탕 먹이시려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어요. 그러나 3년이 채 되지 않아서 그 모든 것이 혹시라도 제가 시댁을 가볍게 여길까 봐 걱정되어서, 그리고 남들은 명절에 다 제사를 지내고 어딘가 인사를 가고 그러니 보편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셨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골탕 먹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 눈치를 보셨던 것 같아요. 일 년에 9번의 제사를 지내고, 2번의 차례와 성묘를 꼬박꼬박 챙기는 집에서 자란 제가 혹시라도 명절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댁을 이상한 집안이라고 생각할까 봐요.


돌이켜보면 갑자기 가족이 되면서 저희는 모두 긴장하고 당황했던 것 같아요. 저와 남편은 8년을 연애했지만, 그 8년 동안 남자 친구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교제를 흔쾌히 허락하신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도 않았거든요. 상견례와 결혼식을 포함해 딱 4번을 만나고 가족이 된 우리는 서로에게 잘 보여야 한다, 남들처럼 지내야 한다, 쉽게 보여서는 안 된다. 잘 보여야 한다. 뭐 이런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머님은 제가 북적북적하고 뻑적지근한 명절을 지긋지긋해한다는 것을 모르셨고, 저도 어머님 냉장고는 늘 복잡하며 저에게 정리안 된 냉장고를 보여주기 싫으시다는 것을 몰랐어요. 서로 대화는 하지 않은 채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흉내내기 바빴습니다. 대화는 어렵고 불편했거든요. 결혼 3년까지는 시댁을 다녀오면 남편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제 정성을 몰라주시는 것 같아 서운했고, 없던 행사들이 자꾸 생길 때마다 뭔가 나를 골탕 먹이시려고 일부로 그러시는가 싶어서 짜증이 많이 났어요. 게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남편의 친척들과의 잦은 만남을 통해 다들 제게 시부모님께 잘해야 한다, 너는 정말 시집 잘 와서 편하게 산다, 너 정도면 편하게 사는 거지, 요즘 애들은 고생을 모른다. 빨리 애를 낳아라. 네가 여기선 막내다. 알아서 잘해야 한다. 이런 말들이 반복되면서 시댁 모임은 언제나 남편과의 다툼으로 끝이 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좋은 마음으로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은 행사는 다른 핑계를 대고 빠지기 시작했어요. 굳이 좋은 만남도 아닌데 억지로 만날 필요가 없다며 남편이 잘 중재해주어서 시부모님 그리고 시댁 친척들과의 만남을 줄여갔습니다. 인내심은 짧고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제 성격이 조만간 어르신들 혈압을 제대로 올릴 것 같아 오히려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있었지요. 굳이 만나서 행복한 사이도 아닌데 자꾸 만나면서 서로 미움을 키울 필요는 없다고요.


그렇게 만남을 줄여가면서 오히려 미움이 줄어들고 조금 편해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시댁 모임에서 친척 어르신이 본인 며느리 자랑을 하시면 저를 깎아내리셨어요. 그분 며느리는 딸보다 더 살갑고 그저 어머님만 보면 이런 아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며 언니는 아들도 하나인데 며느리가 살갑지 않아 짠하다는 듯 말씀하시는데 저도 모르게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툭하고 본심이 탁 나왔습니다. 어른께 해서는 안될 말이었는데, 근데 그 순간 저희 어머님이 크게 웃으시더니 우리 며느리가 이렇게 귀엽다니까 아주 애가 솔직하니 너무 귀여워! 하시더라고요.


모르겠어요. 전에는 잘 보여야 하니까 말을 많이 참는다고 참았는데, 싸해질 뻔한 분위기에 우리 며느리가 이렇게 귀엽다니까! 요 한 마디에 마음이 많이 녹았습니다. 그리고 편하게 말해도 날 미워하지는 않으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날 이후 저는 말이 조금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말 해도 되나 하는 필터가 조금 사라졌거든요. 제가 조금씩 말이 많아지면서 어머님도 조금씩 어머님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희는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게 되었어요. 제가 싫어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러 번 얘기하게 되었고,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분위기,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커피의 맛, 이런 소소한 것들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희는 자연스럽게 친척모임은 줄이고, 시부모님과 밖에서 만나 식사하고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지는 것으로 만남을 바꿔가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지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저희하고 잘 맞더라고요. 만나는 시간을 줄이니 만나서 좋은 얘기만 하게 되고, 짧게 만나니까 서로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거리는 많이 좁혀진 것 같아요. 전에는 시부모님이 어렵고, 불편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좋아하시는 것을 보면 챙겨드리곤 합니다.


이제 봄이 되면 결혼한 지 10년이 됩니다. 급하게 가족이 되느라 뚝딱거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저희는 천천히 가족이 되어가고 있어요. 천천히 가족이 되어가는 대신 단단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남이 가족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흐르는 시간에 추억이 쌓이고, 쌓이는 추억에 서로에 대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진심이 쌓여야 진짜 가족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관습이 묶어놓는다고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가족이 될 순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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