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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미 Sep 06. 2023

목표가 없어도, 어딘가를 향하지 않더라도,

사십춘기 일기

목표가 없으면 좌절도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포기할 일도 없다. 적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까. 그리고 아름다운 곡은 내 앞에 분명히 존재해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는다. 인생에는 이런 세계도 존재했던 것이다. 목표가 없어도, 어딘가를 향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무작정 노력하는 그 자체로 즐거운 세계가.   
-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中 -



퇴사를 하고 한 달 반을 무료하게 흘러 보냈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풀리지 않았던 것인지 대부분 무기력하게 지냈고, 이대로라면 내가 꿈꾸던 퇴사 후의 삶과는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낯선 동네로 이사까지 와서 집 밖을 나가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게 주어진 시간에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동안 힘들었으니 좀 쉬어도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래 보려 하였지만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은 18년이나 일했는데 푹 좀 쉬면 어떠냐 괜찮다, 뭐 어떠냐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하게 아무것도 안 할 줄은 몰랐다. 이러다 진짜 영영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니겠지?

늘 무언가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려니 이것도 못할 짓이었다. 도대체 잘 쉬고 푹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실컷 읽겠다는 책도 잘 읽히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집 근처에 있는 문화센터 프로그램을 샅샅이 훑어보고 수영과 피아노를 배워보기로 했다.


수영은 그래도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운동이었어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등록했지만 피아노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다.

보통 주변 친구들을 보면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 한 번 다녀보지 않은 친구들이 없던데  난 그 흔한 피아노 학원 가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지라 음치, 박치, 몸치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고 단지 맑고 맑은 피아노 소리에 항상 귀도 마음도 같이 녹았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평생 가져갈 악기 하나 배워보는 것도 참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고민 끝에 배워보기로 했다.


백수 두 달 차, 일주일 오전을 회사원처럼 수영과 피아노로 매일 채웠더니 그래도 남들 일어나는 시간에 규칙적으로 움직여서 좋았다.

초등학교가 코 앞이라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 비몽사몽 상태로 초등학생들과 섞여 문화센터로 매일매일 출근을 하고 있다. 활기 넘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다. 이유 없이 뛰고 섞여서 서로 붙잡고 하는 아이들에게 에너지가 느껴진다.


무기력했던 내 생활에 갑자기 활력이 생겼다.

쭈뼛쭈뼛 수영장 물에 몸을 담그고 여전히 안 되는 접영을 하기 위해 코치님 말에 귀 기울이고 수영장 물은 내가 다 먹어 없애버릴 것 같지만^..^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워졌다.

특히 수영을 마치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라테 한 잔을 들고 여름 햇살을 맞으며 작은 공원에 앉아 초록 잎들과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역시 의지가 없는 나는 선생님이 필요하고 강제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내가 배우는 수영, 피아노는 목표가 없다. 누군가에게 평가받지 않아도 된다. 그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모습에 스스로 뿌듯할 뿐이다.


어제보다 평영 속도가 잘 나오고 어제보다 접영에 조금 가까워졌다면 그것만으로 만족스럽다.

죽어라 연습해도 새끼손가락은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은 피아노 실력,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징글벨을

하루에도 몇 시간씩 친다 해도 조급하지 않다.

(과연 그럴까;;)


물론 가끔은 도대체 이 평영은 속도가 왜 안나는 거야. 내 손가락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

왜 매일매일 해도 늘지 않는 거야.


늘지 않는 실력에 즐겁자고 한 일인데 왜 이렇게 집착하고 스트레스받고 있지??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목표가 없어도, 어딘가를 향하지 않더라도

그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매일매일 무언가를 해내고 돌아왔을 때 그 자체로의 즐거움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근성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산티아고 순례길만 보더라도 한국 사람과 독일 사람들이 제일 빠르고 무섭게 걷는다고 들었다.

우리는 늘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것에 도달해야 체끼가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니까.

물론 목표를 달성했을 때 오는 달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수영과 피아노에 목숨 바쳐 하루종일 연습한다 해도 박태환이나 임윤찬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무모한 도전이 될 것이다.


단지 지금은 배우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목표가 없어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배움의 목표이다.


난 앞으로 하는 취미는 조급함 없이 즐기기로 했다. 가끔 집착하게 되고 빨리 완성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마음일 테지만.


친구들과 남편에게 가끔 내가 친 피아노 연주 동영상을 보낸다. 삐걱대고 박자를 무시한 연주, 흡사 로봇 같은 연주에 친구들은 웃기다 좋다 하지만

나는 안다. 첫 악보를 보고 연주를 시작했을 때의 어제의 모습과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한손 연주에서 양손 연주를 시작했을 때의 뿌듯함, 콩나물이 많아질수록 뭐가 된것만 같은 의기양양함을 너희들이 아니?

나를 징글징글 괴롭힌 징글벨



미세하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에 혼자 뿌듯할 뿐이다. 당분간은 매일매일 수영과 피아노로 하루하루를 채울 예정이다.


목표가 없더라도, 어딘가로 향하지 않더라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마흔, 퇴사를 하고 새로 느끼는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도 배움에 대한 열정도 그 자체로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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