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윤, 「하나코는 없다」, 『회색 눈사람』, 문학동네, 2017.
타인에 대한 인식은 무의식적인 조립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식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 우리는 무감각하게 스며드는 폭력성에 대해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어긋난 관계가 수시로 만들어내는 불안과 불화에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하고 나서 후회가 될 만큼. (111쪽).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부쩍 많이 생각하게 되는 시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런 시기에 와닿은 것이 바로 최윤의 단편 소설, 「하나코는 없다」였다. 현실을 재현하는 문학 속에서, 사회는 작가의 인식에 의해 재구성된다. 「하나코는 없다」에 곳곳이 스며들어 있는 성찰의 흔적들은, 소설의 특징을 적재적소로 활용하며 인식의 차원을 미묘하게 지적해낸다. 이는 곧 그의 언어가 지니는 ‘주관성’이, 인식의 ‘주관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명백한 점은, 이 소설이 관계 안에서 무감각과 감각을 오가는 폭력에 대한 회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관계에 있어 타인에 대해 안다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어떤 존재에 대한 기억은 언어적 규정과 틀에 의해 결정된다. 독자는 하나코를 이름이 아닌 ‘하나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익명적인 존재로서 처음 접하게 된다. ‘하나코’는 ‘정면에서 보건, 옆에서 보건 일품인 코를 가진 여자’라는 뜻으로 집단의 가십거리로 소비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다. 반면에, 이러한 별명을 붙인 집단의 구성원들은 작중에서 ‘그’, ‘그들’이라는 대명사나 ‘K’, ‘J’ 등의 알파벳으로 지칭될 뿐이다. 하나코라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위계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작중 하나코를 둘러싼 인물들은 필요할 때만 저마다 품고 있는 환상에 매달릴 뿐,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환상의 인식에 맞지 않는 하나코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코의 정체성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며, 집단에 의해 철저히 타자화되고 배제당한다. 자신이 어떤 별명으로 기억되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을지 모를 하나코의 태도는 그들이 지닌 권력 구조와 폭력성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것은 환상의 이면에 분명히 존재하는 진실이다.
최윤이 지적하고 있는 주관성의 차원은 작중 배경의 범위에도 닿아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베네치아는 미지의 도시다. 진실과 환상의 경계는 이 미지의 도시에 대한 탐험을 통해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폭풍이 이는 날에는 수로의 난간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안개, 특히 겨울 안개를 조심하라……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101쪽).
그러나 거기에는 난간도, 안개도 없었다. 숙소까지 태워다줄 작은 배에 오르면서 그는 서서히 여행 초기부터 그를 지배하던 이상한 최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102쪽).
하나코를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그’는 베네치아라는 도시에 대해 ‘방향을 잃은 환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베네치아도 하나코도 그에게는 멀고 낯설다. 이 미지의 도시는 그간 그들이 규정해 놓은 환상이라는 베일에 싸여 있는 하나코에 대한 비유이다. 그는 이 도시에서 과거를 거닐고 현재를 감각하며, 해소하기에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던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나간다. 때문에 결국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필수 불가결했다. 여기서 그가 미로를 아무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선 것은, 그가 기존 집단의 소속과 인식의 규정에서 벗어난 한 ‘개인’으로서, 진실에 대한 무감각을 감각으로 전환하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한번 우연히 시선에 잡힌 거리의 팻말은 그가 리알토 다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을 알려주는 막연한 지표가 되었을 뿐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지도 없이, 목적지도 없이 걷는 낙망한 자의 자유. 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국의 말을 쓰는 나라에서 침묵으로 미로를 헤매는 자의 안식에 그는 음울한 미소를 지으면서 빠져들었다. 몇 번인가, 하나코, 아니 스코베니 회사 소속 인테리어 디자이너, 장진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이 도시의 배음처럼 울렸다. 그렇게 날 몰라요? 그렇게도? 그것은 함정이 많은 수수께끼처럼 점점 더 깊이 그를 미로투성이의 한 도시 속으로 이끌었다. (129쪽).
환상으로 은폐된 진실로 다가가는 데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거리감’이다. 하나코의 “그렇게 날 몰라요?”라는 물음은 작중 그의 안에서 여러 번 반복되며 맴돈다. 그가 집단에서 멀어지는 개인이 될수록, 하나코와 개인 대 개인으로 가까워질수록, 이 물음에 대한 감각은 하나코가 장진자로 발견되기 위한 베네치아의 여정에서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사색의 여정으로 서서히 단계적으로 변화한다.
독자는 서술자를 통해 소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접하게 되는 인물의 관계와 태도, 기억에 대한 시공간적 정보 등은 모두 어디까지나 소설에서 제시되는 만큼만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하나코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아닌, ‘그’의 시선을 통해 전개된다. 최윤은 이러한 서술 방법을 통해 독자에게 한계적인 인식을 제공하여, 독자가 하나코가 실재하지 않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하나코의 부재로 인해 재현되는 타자에 대한 감각을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가 하나코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결국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코는 익명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래 그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늘 없는 듯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녀가 어느 날 그들의 부름에 대답하지 못할 미지의 곳으로 사라져버리리라고는 한순간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108쪽).
그의 기억 속 과거의 어느 날 하나코는 그들을 떠났고, 그들은 남겨졌다. 그날, 모두가 낙동강가로 표류했던 그 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림자의 실상에 대해서는 굳건히 침묵했을 뿐이었다. (135쪽).
어느 사건으로 인해, 그의 기억 속 과거의 어느 날 하나코는 그들을 떠났고 그들은 남겨졌다. 그 사건은 가히 하나코를 영원한 타자로 묶어 두려는 광기에 가까운 집단의 욕망이었다. 소설 초반에 “그때 있었던 그 작은 불편한 사건, 그런 정도의 일”(144쪽)로 치부되는 이 사건의 진상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밝혀진다. 이것은 그의 시선에 담긴 의도와 주관성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서술하는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그의 시선에 담긴 왜곡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독자가 이 텍스트를 수용하게 되는 이유는, 폭력성에 대한 미묘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이 회고적 산물의 고백적 성격이 독자의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독자는 하나코뿐만 아니라 그들까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삽시간에 연약하고 무력해지는 이들 관계의 끈은 인간관계의 정상성과 그에 담긴 내밀한 폭력성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까지 주어진 끊임없는 의식의 미로이다. 소설을 읽은 후, 독자는 자신에게 남겨진 미로를 헤쳐나가며 자신의 삶, 나아가 보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인식에 대한 탐험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녀의 모든 것이 다 예전과 같아도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목소리도 아니고 어조가 덜 친절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정말 반가운 기색으로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는 갑자기 힘이 조금 빠지는 것을 느꼈다. (129쪽).
언제, 어떻게 하나코는 그들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살았던 걸까. (137쪽).
환상 속 진실의 부재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하나코가 직접 드러나는 부분은 하나코의 말이 따옴표로 직접 표시되는 부분이다. 이 텍스트는 서술 방식과는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서술로만 하나코에 대한 인식을 누적하고 있던 독자는 직접 이야기하는 반갑고 친절하게 화답하는 하나코의 태도가 이질적이고 희한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서술과 하나코의 텍스트 사이에는 괴리가 생기게 되고, 작품 안의 인물과 내용 사이의 문제는 동시에 작가와 독자 사이의 문제로 넘어와 인식에 대한 또 하나의 대응 구조로 확장된다. 하나코는 독자 앞에서 단 한 번도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결국 그녀가 과거에 어땠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결국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코는 없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과 사회에 속하고 만나게 되는 수많은 규정들은 얼마나 그 사람의 본모습에 가까울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신과 타인의 진실을 환상으로 은폐하며 살아간다. 타인이나 집단에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은 무수히 달라진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모두 익명의 존재들이다.
또한 이미 익명으로 편집된 존재인 우리는 인식에 있어 후회가 따라붙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후회에는 앞으로에 대한 긍정적인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기억으로 존재하는 타인과의 관계는 곧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익명의 존재에 대한 진실은, 후회가 수반된다거나 설령 온전히 밝혀지지 못할 것이라도, 끝까지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최윤 소설의 이러한 회고적 성격의 글쓰기는 이를 위해 독자에게 서술 체험을 스며들게 하여 후회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인식에 대한 사유를 확장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