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Day 18 신대륙 최초의 유럽 종교전쟁, 식민지 전쟁

플로리다 세인트오거스틴에서 조지아,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노스캐롤라이나로

by Jaeho Lee

오늘은 긴 이동을 하는 날이라 인디언 관련 방문지가 없었다. 데소토 얘기하느라 어제 블로그에 쓰지 못한 데소토 상륙 기념지 방문 이후의 얘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플로리다에 들어오면서부터 차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핸드폰 로밍이 끊기지 않아서 편해졌다. 이제 문명사회로 들어온 느낌이다. 브래덴튼(Bradenton)을 떠나 세인트 오거스틴(St. Augustine)으로 가는 길에 올랜도(Orlando)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미국에 살았던 기간만 10년이 넘었는데, 그 유명한 올랜도를 우리는 이제야 처음 들른다.


그냥 점심 먹으러. 예상했던 것보다 큰 도시이고, 이곳 쇼핑몰은 번화하고 없는 게 없을 정도이다. 가려던 식당에 줄이 길어 포기하고 Zoe’s Kitchen이라는 곳에서 간단하지만 건강한 느낌의 식사를 맛나게 했다. 오전부터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던 아내도 점심 이후 컨디션을 회복하는 느낌이다. 올랜도의 매직(Orlando Magics)인가?


세인트 오거스틴에서 우리의 행선지는 산마르코스 요새(Castillo de San Marcos)이다. 국립공원서비스에서 관리를 맡고 있는 곳이다. 세인트 오거스틴은 이제까지의 우리의 여정에서 산타페 다음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인 도시라는 명성 때문이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6113033_0_crop.jpeg

어제 정리해 본 연대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1564년에 프랑스인 로도니에(Laudonniere)가 캐롤린요새(Fort Caroline)를 건설했고, 1565년에 메넨데즈(Menendez)가 세인트 오거스틴을 건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년 늦은 세인트 오거스틴이 어떻게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1562년,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들을 태운 배가 플로리다 북동부 지금의 잭슨빌(Jacksonville) 인근 해안에 상륙한다. 위그노 교도들은 종교혁명의 주도자 중 하나인 칼뱅을 추종하는 신교도들로, 카톨릭의 허례허식과 교황숭배를 배격하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였다(영국 청교도들도 이들을 모델로 삼았다).


이들의 식민지 개척은 당시 프랑스 왕실의 승인 하에 진행되었는데, 위그노 교도들 입장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프랑스 왕실의 입장에서는 카톨릭과의 갈등으로 골치아픈 신교도들을 해외로 보내버리는 동시에, 이들의 식민지가 성공할 경우 서인도제도에서의 스페인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확보되기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프로젝트였다.


포트로얄(Port Royal)이라 이름 붙인 그 곳에 30명이 정착을 위해 남았고, 지도자 리보(Ribault)는 보급품과 후속 정착민을 데리고 오겠다며 프랑스로 떠났다. 하지만, 리보는 프랑스에서 신교도와 구교도간의 전쟁에 휘말리면서 결국 영국으로 도피하게 되고, 후속 보급을 기다리던 정착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작은 보트를 만들어 프랑스로 출항한다. 하지만 대서양 망망대해를 작은 보트에 의지해 가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부족한 식량과 물은 바닥나고 만다. 결국 이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희생자를 정한 뒤, 인육으로 버티는 상황까지 겪은 후에야 지나던 영국배에 구조된다.


그 사이 프랑스에서는 종교전쟁이 끝나고 다시 위그노 교도들의 식민지 진출이 추진된다. 1564년에 300명 규모의 식민지 개척단이 기존의 포트로얄 자리로 되돌아와서, 왕의 이름을 기려 캐롤린이라는 요새를 건설했다. 그런데, 이들 정착민들의 문제는 자급자족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 미국대륙에 진출한 많은 유럽인 식민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대부분 호기심, 돈벌이, 종교나 정치적 자유 등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개척단이 구성되었던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인답게 빵집을 지어 바게트를 구웠고, 와인을 만들었으나 정작 생존에 필수적인 농사나 사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부족했다. 초기에는 자신들의 물품을 인근 원주민들과 교환하여 식량을 얻었으나, 이도 곧 바닥이 났고, 종국에는 식량을 훔치는 일로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정착 1년 만에 식민지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귀환하기로 결정한다. 바로 그 시기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함대가 거의 동시에 이곳에 도착한다. 리보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캐롤린 요새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메넨데즈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는 이곳에 개척된 프랑스 식민지를 파괴하고 스페인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첫 조우에서 프랑스 함대가 기선을 제압하고, 메넨데즈는 캐롤린에서 60Km 남쪽 지점에 상륙하여 캠프를 차린다. 메넨데즈는 이 장소를 세인트 오거스틴(성아우구스투스) 축일에 발견했기에 ‘세인트 오거스틴’이라고 이름 붙였다.


1차 조우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리보는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출항하지만 허리케인을 만나 도리어 먼 바다로 밀려나가고 만다. 메넨데즈는 프랑스 병력이 비어 있는 틈을 노려 악천후를 뚫고 육로로 캐롤린 요새를 밤에 급습한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 50여명을 제외한 142명을 학살한다. 당시 스페인은 카톨릭의 열렬한 신봉국가였고, 이들에게 신교도들은 이교도들이나 다름없었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이단자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며칠 후, 허리케인으로 밀려났다가 난파된 리보의 부대가 세인트 오거스틴 남쪽 해안에 상륙하게 된다. 스페인군과 마주치게 된 이들은 항복을 하는데, 메넨데즈는 이들을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처형한다. 당시 메넨데즈의 기록에는, 이교도들을 처형하는 방식인 화형 대신에 참수를 했으므로 자신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라고 적혀있다. 다만 4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3명은 악기 연주자들이었고, 한 명은 자신이 카톨릭교도임을 밝힌 사람이었다.


이들이 살해된 지역을 흐르는 강은 마탄자스(Matanzas)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스페인어로 ‘도살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이름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1565년에 있었던 리보의 프랑스군과 메넨데즈의 스페인군의 대결에서 메넨데즈가 승리하면서 플로리다를 비롯한 미국 동남부 해안 일대에 스페인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세인트 오거스틴은 그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현재 미국 내에서 유럽인이 세운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명성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방문하는 산마르코스 요새는 1695년에 세인트 오거스틴을 방어하기 위해 건축되었다. 1763년 파리조약으로 플로리다가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양도되면서 영국군 수중으로 넘어갔다가, 1783년에 미국이 독립하면서 다시 스페인 수중으로 돌아온 뒤, 1821년에 미국으로 양도되는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6113242_1_crop.jpeg

요새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정방형의 모습을 기반으로 네 귀퉁이에 돌출형 요새가 구축되어 있으며, 입구 쪽으로는 요새와 다리로 연결되는 보루가 있다. 이 요새는 건설된 이후 여러 차례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수십일 간의 포위공성전에도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 특이한 돌출형 구조가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요새 성채 바깥에서 한 번 살펴보니 역시 공격하기 쉬운 구조가 아니다

20190728_170846.jpg

요새 안으로 들어가면 방마다 당시 모습을 재현해 두었고, 요새의 역사, 각 공간의 설명, 당시 무기에 대한 설명 등이 꼼꼼히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병사의 복장을 한 안내인들이 친절하게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설명도 해준다.


미국이 이 요새를 인수한 이후에는 이곳을 매리온 요새(Fort Marion)라고 불렀고, 인디언과의 전쟁 중에는 인디언 포로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아파치 부족 포로들도 있었다는 설명을 들으니 갑자기 포로로 잡혔었던 아파치 전투추장 제로니모가 떠올랐다. 이에 대해 물으니 아파치 포로들를 태운 기차는 플로리다 서부의 탈라하시에 도착했고, 제로니모는 그곳 수용소에 갇혔단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이곳에 수용되었고 여기서 그의 딸도 출생했다고 한다. 가족이 떨어져있게 된 이유를 물으니, 아마도 인디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냐고 대답한다. 머나먼 땅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을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1564467884455.jpg

요새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줄을 서있다.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물은 뒤, 어떤 증서에 글을 적고 인장(seal)을 찍어주고 있는데, 아내가 관심을 보인다. 자기도 하나 받고 싶다고. 그런데, 이게 주니어 레인저라고 어린이들 대상 프로그램이란다. 그럼에도 아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줄 서있는 아이들 다 떠나면 하나 부탁해서 받고 싶다고.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6113504_2_crop.jpeg

나는 요새 옥상으로 올라가서 주변 경치와 전시되어 있는 당시 화포들을 구경한다. Mortar, Howitzer, Cannon을 전시하고 설명을 해 놓았다. 우리말로 박격포, 곡사포, 대포에 해당한다. 그 동안 미군과 인디언 전투 장면에서 미군들이 Howitzer를 동원했다는 기록을 보면서 이게 어떤 건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감이 잡힌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6113557_3_crop.jpeg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아내가 증서를 받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마침 요새 옥상에 있는 가이드가 아이들에게 주니어 레인저 뱃지를 나눠주고 있어 다가가서 부탁해본다. 저 아래에 my kid가 있는데 하나 주면 안되겠냐고. Of course! 아내에게 올라오라고 손짓한다. 가이드가 웃으며 ‘good kids’라며 나와 아내에게 각각 하나씩 선물한다.


이곳은 유난히 스페인어를 쓰는 방문객이 눈에 띈다. 스페인이 미국 땅에 최초로 식민지를 건설했음에도 결국에는 영국에 밀려나고 말았다는 역사를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시 스페인이 영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면, 전세계 공용어는 스페인어가 되었을 것이다.


요새를 나와 길 건너편에 있는 세인트 오거스틴 시내로 들어가보니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답게 옛 모습을 재현하고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미국이 아닌 어느 유럽의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가 미국의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듯 하다. 도처에 ‘America’s Oldest’, ‘the Oldest In US’와 같은 간판들이 보인다. 가장 오래된 도시이니, 이곳의 모든 것이 미국 최초라고 부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듯하다.


가장 오래된 학교라는 작은 건물 입구에는 입장료 5불을 내면, 학교에서 강의를 해주고 가장 오래된 학교의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 되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건, 이 도시가 세워진 지 가장 오래된 것은 맞지만, 1702년 영국군의 공격 때 마을이 불타서 대부분 목조였던 당시 많은 건물들은 잿더미로 사라지고 그 이후 재건된 것으로 봐야 한다.

20190728_181205.jpg

이곳에는 젊음의 샘물(Fountain of Youth)이라는 관광지도 있다. 이는 1513년에 플로리다를 처음 탐사했던 폰세데레온과 관련된 소문에서 비롯된다. 당시 폰세데레온이 플로리다 탐사를 온 목적이, 이곳에 신비의 샘물이 있는데 이를 마시면 젊음을 다시 얻게 된다는 전설을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폰세데레온은 이곳에 상륙하지도 않았고, 공식기록에는 샘물과 관련한 언급도 없다.


그럼에도 젊음의 샘물 앞에는 여러 대의 관광버스들이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 이처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세인트 오거스틴시에서 ‘역사적 진실 규명 확인을 위한 위원회’를 발족시켰었는데, 당사자들의 반발과 고소고발이 난무하여 결국 중단되었다고 한다. 돈은 무엇보다 막강한 권력이 된다.


저녁시간이 되자 16세기 복장을 한 사람들 한 무리가 거리에 등장한다. 이들은 관광객들을 환영하면서 함께 사진을 열심히 찍어준다. 이런 작은 관심이 관광객에게 즐거움과 좋은 추억을 선사한다. 중요한 건 박물관 개수나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컨텐츠이다. 이렇게 어제 여행 17일째를 마무리했다.


여행 18일째인 오늘은, 세인트 오거스틴(St. Augustine)을 출발하여 조지아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거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스미스필드(Smithfield)라는 곳까지 다시 한 번 500마일(805Km)을 이동한 날이다.


도중에 조지아주 사배너(Savannah)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고 잠시 시내 구경을 했다. 사배너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와 조지아주의 경계를 이루는 ((사배너강변에 만들어진 오래된 도시로, 도심과 강변에 오래된 주택과 건물들이 고풍스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850년에 기차역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박물관과 비지터센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들어선다. 여기에선 시위(Sewee)부족 얘기를 해야겠다. 영국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찰스턴(Charleston)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시위부족이 당시 찰스턴 인근에 살고 있었다.


이들 부족은 찰스턴의 백인들을 통해 자신들의 사슴가죽을 백인 물품과 교환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받는 사슴가죽 값이 영국 시세의 5%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영국과 직거래를 추진하기로 하고, 직접 영국으로 가기 위해 전 부족민이 합심하여 많은 수의 카누를 만든다. 그리고 전재산과 사슴가죽을 잔뜩 싣고 영국상선들이 들어오던 동쪽을 향해 출항한다. 당시 이 카누함대에는 노약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부족원 전체가 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양에 들어서자 카누는 높은 파도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부는 지나가던 영국 노예선에 구출되었지만, 결국은 배에 있던 노예들과 함께 서인도제도에 팔렸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시위부족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린다. 이들은 콜럼버스보다 조금 더 무모했던 듯싶다. 어처구니가 없어 슬픈 얘기이다.


노스캐롤라이나로 들어서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펨브록(Pembroke) 캠퍼스 표지판이 나온다. 원래 펨브록 캠퍼스는 인디언 원주민들을 위한 미국 최초의 주립 4년제 대학으로 시작한 곳으로, 그 모태는 크로아탄(Croatan)으로도 알려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럼비부족(Lumbee)을 위한 공립학교였다. 크로아탄부족은 내일 방문할 로아노크 식민지에서 다시 얘기하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 운전 하다 보니 피곤한 것도 문제지만 많이 지루하다. 아내가 노래를 해 보란다. 노래방의 부작용은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가 신청곡을 고르고 인터넷으로 가사를 찾아 말해주면 나는 기억하고 있는 멜로디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중 문득 인디언 관련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그런데..... 제목으로 떠오르는 노래는 하나밖에 없다.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아무리 그 노래 가사를 음미해보아도 도대체 왜 인디언 인형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래도 노래는 신나니까 계속 부른다. '나의 마음은 인디언 인형처럼, 워워워워 워워, 까만 외로움에 타버렸나봐. 오 마이 베이베! '


내일은 영국인들이 미대륙에 최초로 세웠던 로아노크(Roanoke) 식민지를 찾아가 본 뒤 버지니아주로 이동해서 윌리암스버그(Williamsburg)에서 숙박할 예정이다. 우리가 반환점으로 여기고 있는 워싱턴 DC에 가까워지고 있다.

keyword
이전 08화Day 17 데소토, 제2의 잉카제국을 찾아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