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제 묵었던 호텔은 Legacy Hotel at IMG Academy이다. Bradenton의 호텔 중 투숙객들의 평점이 높고 가격이 합리적이라 선택한 곳 이었는데, 알고 보니 IMG 아카데미라고 세계적인 스포츠 교육기관의 캠퍼스 안에 있는 호텔이다. 로비에는 익숙한 스포츠 선수들 사진도 붙어있다.
먼 길을 달려 플로리다로 온 건 데소토(De Soto)의 상륙지와 St. Augustine을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장소는 스페인이 미국땅을 개척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먼저 이곳 Bradenton에 있는 데소토 기념지(De Soto National Memorial)부터 방문한다. 국립공원서비스에서 운영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고, 해변 수목인 맹그로브(Mangrove)가 우거진 해변가로는 트레일이 조성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약 20분 가량 영화를 상영하는데, 4년간 진행된 데소토의 원정 여정을 나름 알차게 설명해주고 있다. 아직 아침 10시인데도, 트레일을 따라 걷는데 온 몸에 땀이 밴다. 덥고 습하다 보니 이전에 남서부 지역을 여행하던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갑자기, ‘멕시코 및 미국 남서부의 뜨겁고 건조한 사막과 중서부의 끝없는 초원지대를 떠돌았던 코로나도와 무덥고 습한 동남부 늪지대를 행군하는 데소토 중 누가 더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느 하나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그 동안 당일의 방문지에 맞춰 이야기를 진행해 왔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 순서가 좀 혼동된다고 아내가 얘기한다. 옆에서 계속 얘기를 듣는 본인도 그러는데, 블로그 독자들은 더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단다. 그래서 간단하게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에 대한 주요 사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 봤다.
- 1492 콜럼버스, 서인도 제도 발견 (바하마, 쿠바, 히스파뇰라), La Navidad 건설
- 1513 후안 폰세데레온(Juan Ponce de Leon, 스페인), 플로리다 동해안 탐사
(공식 기록상 유럽인 최초의 미국 발견)
- 1519-1522 마젤란(포르투갈), 세계일주
- 1519-1523 코르테즈(스페인),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 정복
- 1521 폰세데레온의 플로리다 진출 실패
- 1525-1527 피사로(스페인), 페루의 잉카제국 정복
- 1528 Panfilo de Narvaez(스페인), 플로리다 서해안 탐사
- 1539-1543 데소토(Hernando de Soto, 스페인), 플로리다 상륙. 미국 동남부 탐사
- 1540-1542 코로나도(스페인), 미국 남서부 탐사
- 1564 Rene de Laudonniere(프랑스), 플로리다 북쪽 동해안 Fort Caroline 식민지 건설
- 1565 Pedro Menendez de Aviles(스페인), 플로리다에 St. Augustine 기지 건설.
Fort Caroline의 프랑스인 공격
- 1585 Walter Releigh(영국), 로아노크섬(Roanoke Island)에 식민지 건설
- 1588 스페인 함대 영국 공격
- 1607 영국,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
- 1620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들 플리머스 상륙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고, 그 소식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청교도들이 미국 땅으로 이주해서 오늘날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를 발견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여러 스페인 탐험가와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문명을 파괴하고 정복해 나가게 된다.
메이플라워호가 뉴잉글랜드 지방에 상륙했을 때는, 폰세데레온이 미국 플로리다를 발견한지 107년 후, 코로나도와 데소토가 미국을 탐사한지 80년이 지난 후이고, 스페인과 프랑스가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건설한지 55년 후이며, 심지어 영국인들이 로아노크와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한지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콜럼버스와 코로나도 얘기는 이전에 다루었고, 이제는 데소토로 넘어간다. 위의 연대기에 나와 있는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들은 향후 일정에서 다룰 예정이다.
어제 잠시 언급했듯이 데소토는 어린 나이에 서인도 제도로 건너와 원주민과의 전투를 통해 경험과 명성을 쌓았고, 피사로의 잉카 원정에서 큰 공헌을 세워 재산도 많이 축적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자기 사업에 도전한다. 바로 플로리다 원정이었다.
당시 플로리다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폰세데레온이 1513년 플로리다의 동해안을 탐사하고 이곳을 La Florida로 명명했는데, 이후 1521년에 그는 이곳을 식민지화 하기 위해 다시 방문했다가 원주민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1528년에는 Panfilo de Narvaez가 플로리다 서해안 탬파베이 인근에 상륙한다. 하지만 그의 원정도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인해 실패하고, 그의 부대는 임시방편으로 만든 보트를 통해 미국 남부 해안을 따라 멕시코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미시시피강 하구에서 난파하여 대다수가 사망하고 극소수의 생존자만이 8년간 미대륙의 인디언 마을들을 전전한 끝에 1536년 멕시코로 귀환한다. 이 생존자들이 미대륙 어느 곳엔가 금이 있다고 전하면서 코로나도와 데소토의 원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데소토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했는데, 622명의 군인들과 기타 수행원, 200마리의 말 그리고 돼지와 공격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데소토 함대가 Tampa Bay의 Bradenton 인근에 상륙했을 때 한 무리의 인디언 전사들과 마주치게 되고, 스페인군이 공격하려 하자 무리 중 한 명이 스페인말로 소리쳤다. 그는 오르테즈(Juan Ortez)라는 자로, 11년전 Narvaez 원정대로 플로리다로 왔다가 인디언들에게 붙잡혀 지내던 중, 인근에 스페인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나선 길이었다. 인디언들의 문화와 언어를 배운 오르테즈의 참여는 데소토 원정에 큰 도움이 된다.
데소토 기념지에 전시된 데소토부대 상륙 재현 사진
데소토는 이전의 중남미 원정 경험을 통해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그는 원주민 마을의 식량을 약탈하고 인원을 대규모로 징발하여 짐꾼으로 활용함으로써 보급품의 조달과 운송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원주민 짐꾼들 목에 체인을 묶은 채로 끌고 다녔는데, 이들이 지치면 버리고 다른 인원으로 대체했다. 도망치려 하다가 잡힌 원주민은 불에 태워 죽이거나 공격견들의 먹이감으로 사용함으로써 원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어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같은 시기에 남서부로 진출한 코로나도의 경우에도 잔혹행위가 있었지만, 데소토처럼 무자비하고 일상적으로 행해지진 않았다. 이는 두 인물의 성격상 차이일수도 있고, 코로나도 원정은 멕시코 총독이 후원하는 공식적인 성격이 강했던 반면, 데소토 원정은 전적으로 자신이 투자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다른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데소토의 정복 방식은 당시 미국 남동부지방 원주민 사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된다. 데소토는 보물, 식량과 노예확보를 목적으로, 가는 길의 주요 원주민 마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며 진출했는데, 이로 인해 그 지역의 원주민 마을들이 모두 황폐화된 것이다. 유럽인들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 식량 부족 그리고 젊은 인력들이 사라지게 됨으로 인해 데소토 진출 경로상의 원주민 사회들은 존속의 기로에 서게 된다.
플로리다 서해안을 따라 북상한 데소토는 오늘날 탈라하시(Tallahassee) 인근에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 원래 그는 해안선을 따라 계속 진행하여 쿠바로부터 오는 보급선의 지원을 받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먼 지방 출신의 원주민 노예로부터 여왕이 다스리는 귀한 보물이 있는 나라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이에 데소토는 원래의 계획을 접고 여왕의 나라를 찾아 북쪽으로 진군한다.
코로나도가 푸에블로 마을에서 퀴비라 얘기를 듣는 것(Day 12)과 너무나 흡사한 장면이 같은 시기에 미 대륙 양 끝의 스페인 원정대에게 발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집요하게 금에 집착하는 스페인인들을 멀리로 유인해내는 방법을 비슷한 시기에 원주민들이 알아낸 것일 수도 있다.
데소토의 부대는 계속 북으로 진출하여 오늘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부근에서 여왕이 통치하는 코피타체키(Cofitachequi)를 찾아낸다. 이곳은 토양이 기름지고 숲도 울창해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이었기에, 데소토 부대원들은 이곳을 식민지로 개척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코로나도와 마찬가지로 금을 찾으러 온 데소토에게 식민지 개척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는 여왕이 축적해 두었던 마을의 진주를 모두 약탈한 뒤, 자신들을 친절하게 대접해 준 여왕을 인질로 끌고 북서쪽의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향했다. 이곳 산지에 금과 같은 광물이 있다는 인디언들의 얘기와, 데소토 본인이 잉카의 산지에서 잉카제국과 금광을 찾아냈던 경험이 있기에 산지에서 금을 발견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금을 찾지 못하게 되자, 그는 계속 원주민 마을들을 약탈하고 노예로 차출하며 남쪽으로 내려가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이라는 타스칼루사(Tascalusa)에 도달하게 된다. 데소토는 그곳의 왕에게도 원주민 짐꾼과 여자를 요구하고, 이에 왕은 인근의 마빌라(Mavila)라는 곳에 이들을 준비해 놓겠다고 한다.
며칠 후 데소토가 선발대를 이끌고 그를 위한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는 마을로 진입하는데, 이는 함정이었고 숨어있던 원주민 전사들이 데소토 일행을 공격한다. 스페인군은 결사적으로 마을을 빠져 나온 후 나무 방책으로 둘러싸여 있던 마을을 포위 공격하고 불을 지른다.
스페인군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전투로 2-3천명의 원주민이 살해당하게 되는데, 스페인군도 20여명이 사망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애초에 기습공격을 원주민이 먼저 시행했음에도 희생자 수에서 이처럼 불균형이 나타나는 것은 양측의 무기와 방어장비의 차이가 원인이다.
당시 원주민들의 무기인 화살과 돌도끼, 나무곤봉으로는 투구와 갑옷을 걸친 스페인군을 공격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에 벌거벗은 원주민들의 몸은 스페인군의 날카로운 칼과 창에 무방비 상태였다. 희생당한 스페인군은 대부분 투구로 보호가 되어 있지 않은 부위였던 눈이나 입에 화살을 맞은 경우였다.
하지만 이 전투는 스페인군에게도 타격이 되었는데, 원정 후 처음으로 다수의 병력 손실이 있었던 데다가, 많은 보급품들을 원주민들에게 뺏겨 불 속에서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즈음에 데소토는 6일정도 걸리는 바닷가에 쿠바에서 온 보급선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는 현 시점에서 보급선을 만나게 되면 부하들이 모두 이를 타고 쿠바로 탈출하려 할 것이고, 또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보물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쿠바로 알려지는 것도 우려하여, 보급선 도착을 비밀에 부치고 다시 북서쪽으로 행군한다. 이 시점에서 데소토의 부대는 600명 중 100명 정도를 잃은 상황이었다.
이후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쪽으로 더 나가보지만, 원하던 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기세가 떨어진 스페인군에 대한 원주민들의 공격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1541년 겨울에 스페인군은 다시 미시시피강까지 후퇴하는데, 혹독한 겨울 날씨에 다수의 인원이 사망하고 사망자중에는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오르테즈도 있었다.
통역까지 잃은 데소토는 강을 통해 바다로 탈출을 추진하고, 기마 정찰대를 강 하류로 보내 바다까지의 거리를 확인해 보게 한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야 돌아온 정찰대는 아무리 가도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상심한 데소토는 병에 걸려 죽게 되고. 그의 죽음으로 인근 원주민들의 사기가 오를 것을 우려한 스페인군은 한 밤에 그의 시신을 모래주머니와 함께 미시시피강에 몰래 수장시킨다. 당시 기나긴 원정에 지친 일부 스페인군은 그의 사망을 반갑게 받아들였다고도 한다.
데소토의 사망 후, 잔여 병력은 Narvaez 원정대의 생존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쪽으로 육로를 통한 멕시코로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텍사스의 건조지역에서 식량이 바닥나고 약탈할 원주민 마을도 없게 되자 1년 만에 다시 미시시피강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는 최후의 수단으로 뗏목을 만들어 미시시피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는다. 이들은 몇 주간에 걸쳐 미시시피강을 내려간 뒤 다시 두 달 가까이 멕시코 만을 따라 항해하여 결국 4년 만에 귀환하게 되는데, 출발 때 병력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데소토의 미국 탐사 경로 추정도(초록색은 데소토 사후 육로로 멕시코 귀환을 시도했던 경로)
데소토의 미국 남동부 탐사는 해당 지역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데소토 탐사 후 20년이 지난 1560년대에, 데소토 탐사대원 일부가 그 지역을 다시 방문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이 보았던 번성했던 마을들이 모두 초토화되고 집터인 마운드(mound)만 남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원래 해당 지역은 마운드 문명에 기반하여 계급질서가 유지되는 강력한 사회였으나, 데소토의 원정은 이런 시스템을 모두 붕괴시킨 것이었다.
이후 이 지역은 여러 부족들의 수평적 연합체 성격으로 재편되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진출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체로키, 크릭, 촉토, 치카소, 세미뇰 부족이 그들이다.
데소토 이야기를 하루에 다 하려다 보니 길어졌다. 오늘 두 번째 방문지 St. Augustine은 내일 다뤄야겠다. 이 얘기를 하려면, 영국 이전에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 지역에 건설했던 식민지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 하나의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잠시 이 블로그 성격을 고민해 본다. 여행이야기를 하는 곳인가, 역사이야기를 하는 곳인가?
내일은 또 다시 장거리 이동을 하는 날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까지 북상하여 Smithfield라는 곳에서 묵을 예정이다. 아웃렛 쇼핑센터가 있는 곳으로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