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0시에 호텔을 출발해서 이곳 플로리다주 시간 오후 8시에 Bradenton에 도착했다. 출발지인 앨라바마주보다 시간대가 한 시간 빠르므로 9시간을 이동한 셈이다. 점심시간 한 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8시간을 차에 있었다. 나는 차를 오래 타는 것에 어느 정도 면역력이 있는 것 같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차를 많이 타고 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시간 운전도 다른 사람들만큼 힘들어하지 않아서 다소 무리한 일정의 이번 여행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힘들어 보여 걱정이 된다. 원래 계획할 때는 중간 중간에 유명한 관광지나 대도시도 경유하는 ‘즐기고 공부하는 여행’을 생각했었는데, 일정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가 있어 인디언 중심으로만 여정이 만들어졌다. 동반자에 대한 고려가 조금 부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내일 모레 플로리다를 떠나 북쪽으로 올라가는 일정도 차를 오래 타야 하는 상황이다. 어쨌건, 31일까지 워싱턴 DC에 도착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조금 여유 있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껏 우리는 동쪽으로 이동해왔다.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하나씩 있는 듯 하다. 주로 오후에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데, 해가 서쪽에 있기에 운전이 편안한 것이 장점이다. 단점은 시간대가 바뀌면서 시간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여행을 시작했던 애리조나주와 지금 이곳 플로리다주는 3시간 차이가 난다. 동부 시간이 더 빠르므로, 지금껏 세시간을 잃은 셈이다. 바쁜 일정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오늘처럼 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지면 일정이 더 촉박해진다.
처음 여행 계획을 짤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두주 후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하게 되면, 상황이 바뀌게 된다. 시간을 벌고, 대신 지는 해를 마주하며 운전해야 한다.
오는 도중에 조지아주를 통과했는데, Albany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플로리다주로 넘어왔다. 열 한번째 주를 거쳐 열 두 번째 주로 넘어온 셈인데, 아칸소주에서는 잠만 잤고, 조지아주에서는 점심만 먹었으니 이들을 카운트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다른 방문지가 없으므로 보충수업 시간이다. Day 9에서 시작했던 콜럼버스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 한다.
La Hispanola에 도착한 콜럼버스 일행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뜻밖의 사고를 당한다. 함대의 기함 격인 산타마리아호가 조류에 밀려 산호초에 좌초를 하고 만 것이다. 콜럼버스는 결국 산타마리아호를 포기해야 했고, 섬의 원주민들은 카누를 타고 나와 산타마리아호의 짐을 다른 배로 옮겨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콜럼버스는 이 사건을 ‘이곳에 머물라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는 산타마리아호의 목재를 이용해 그곳에 작은 요새를 건설했는데, 크리스마스에 건설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요새는 Villa de la Navidad (성탄마을)이라고 불렸다. 콜럼버스는 39명의 선원들에게 1년을 버틸 충분한 양의 식량과 씨앗종자를 주어 이곳에 남겼다.
콜럼버스는 이들에게 원주민들을 공격하거나 모욕 주는 일(특히 여자들에게)을 하지 말고, 한데 모여 지낼 것을 당부한 뒤 나머지 선원들과 다시 출항했다. 원래 그는 Carib라 불리는 부족이 사는 섬을 찾을 계획이었으나, 오랜 항해에 지친 선원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상황이 되자,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돌아가는 도중 아조레스 제도 인근에서 강력한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맞이했고, 콜럼버스는 자신의 신대륙 발견 소식이 스페인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항해를 기록한 문서에 기름을 먹여 배 밖으로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1493년 3월 15일 마침내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1492년 8월 출항 후 32주만의 귀환이었다.
콜럼버스의 일차 항해 경로
콜럼버스는 이제 유럽대륙에서 제일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신대륙 발견의 증표로 데려온 인디언 원주민 그리고 앵무새 같은 희귀한 것들과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왕궁까지 개선행진도 했다. 이 성공으로 스페인 왕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고 추가 프로젝트를 승인 받았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Hispanola에 대한 스페인 왕실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새로운 자원 확보와 원주민들의 기독교화. 당시 스페인은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직후였고, 십자군 전쟁의 주요 후원자가 될 정도로 카톨릭 선교에 열성적이었다. 콜럼버스는 Hispanola에서 확보하는 자원의 1/8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1493년에 콜럼버스는 다시 Hispanola로 향한다. 1년 전에는 세 척의 배와 90명의 선원이었는데 이번에는 17척의 배와 1200명의 일행이 함께 했다. 여기에는 신세계에서 부와 모험을 추구하는 수백 명의 귀족들과 말, 양, 소와 같은 가축도 포함되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식민지 개척대가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1년 전 39명의 선원을 남겨 두었던 La Navidad 요새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시신들은 부패한 채 해변에 널려 있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까지 함께 동행하고 다녔던 원주민을 통해, 요새에 있던 스페인인들이 여자들을 붙잡아가면서 원주민들의 분노를 샀고, 마침내 Caonabo라고 하는 추장의 지도하에 원주민들이 스페인인들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La Navidad를 포기하고 Hispanola섬 동쪽의 해안을 선정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한 뒤, 스페인 여왕을 기리는 뜻으로 La Isabela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내륙으로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내륙의 개울 바닥에서 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문제가 시작된다. 해외에 개척한 식민지의 성공여부는 그 지도자의 관리 역량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무모한 탐험가였지 합리적인 행정가는 아니었다.
스페인인들은 내륙으로 진출하여 금광을 찾아 나서지만, 어디에서도 금광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상 이곳에는 개울에 소량으로 존재하는 사금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고,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조금씩 채취하고 모아온 것에 불과했다. 콜럼버스는 금을 얻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일정량을 할당하여 바치도록 강요했다. 원주민들이 이를 맞추지 못하면 이들은 다른 물품을 만들어 바쳐야 했다.
원주민들에 대한 착취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인들은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원주민들을 고문하고 살해하였으며, 식량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콜럼버스는 이제 막 개척한 Hispanola섬 및 La Isabela의 관리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동생 디에고에게 Hispanola의 관리책임을 맡긴 뒤 새로운 땅에 대한 탐사에 나선다. 그가 없는 동안 Hispanola의 상황은 더 나빠지고 농사 실패로 인한 식량부족과 질병으로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상품화하여 노예로 팔기 위해 대량으로 스페인에 실어 나른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항해 중 혹은 스페인 도착 후 사망했는데, 병균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 왕실은 이들 원주민들을 전도와 교화의 대상으로 여겼기에, 원주민들을 노예 상품화 하는 콜럼버스의 행동은 왕실을 불편하게 했다.
지도자에 대한 Hispanola 주민들의 원성, 약속했던 자원 확보의 실패, 원주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착취 및 노예화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 콜럼버스에 대한 신임이 떨어져 있던 상황에서, 추가적인 두 차례의 항해마저 별다른 결실을 가져오지 못하게 되자, 결국 스페인 왕실은 서인도 제도에 대해 콜럼버스에게 부여했던 모든 특권을 몰수한다. 이후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의 재신임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지만 무위에 그치고, 결국 재산과 명예를 모두 잃은 채 1506년 스페인에서 쓸쓸히 사망한다.
한 때 세계적 대 스타였던 콜럼버스의 말년은 참으로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대륙 발견자로서 그는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 중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으니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콜럼버스를 생각하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운이 좋아 성공하는 경우에는 오래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앞서 Day 9에서 언급했듯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매우 무모한 시도가 운이 좋아 성공한 것이다. 이를 실력이나 역량 때문으로 착각하게 되면 낭패를 보게 된다. 운이 좋았기 때문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또 다른 성공을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 한가지 생각은, 사람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탐험가였던 콜럼버스가 관리와 행정의 책임을 맡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서인도제도에서 콜럼버스의 사업은 실패했지만, 스페인은 이곳을 거점으로 활발한 탐사, 정복 활동을 벌이는데, 결국 멕시코의 아즈텍과 페루의 잉카제국을 정복하여 엄청난 부를 획득하고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극하게 된다.
피사로(Pizarro)가 잉카제국을 정복할 때, 선두에 서서 활약했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10대의 나이에 스페인을 떠나 서인도 제도로 가서 파나마 등지에서 인디언과의 전투로 실력을 인정받아 잉카정복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 성공으로 꽤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재산을 밑천 삼아 플로리다 정복에 나선다. 그의 이름은 에르난도 데소토(Hernando de Soto)이다.
우리는 내일 그가 상륙한 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플로리다 동쪽 해안에 있는 세인트 오거스틴 (St. Augustine)으로 이동할 것이다.
아, 한가지 더. 콜럼버스의 서인도 제도 발견 후 스페인은 이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타이노(Taino)라 불리던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었고, 이들은 채 백 년도 되지 않아 대부분의 섬에서 멸종하고 만다. 스페인이 자행한 전쟁, 가혹행위, 과도한 강제 노동, 새로 전파된 질병, 토착 농작물의 유실로 인한 굶주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리고 스페인은 이 지역의 플랜테이션을 유지, 확장시키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300년에 걸쳐 1천2백만에 이르는 노예를 들여와서 멸종된 원주민의 노동력을 대체해 나간다.
유럽인들은 불과 30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북미대륙에서는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고, 서인도 제도에서는 원주민들을 멸종시키고 아프리카인들로 대체시키는 새역사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