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5년 전 쓴 메모와 일기들을 들춰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더 많은 날들을 무기력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갔다가 친정에서 챙겨 온 오래된 일기장들을 호주에 돌아와 6개월 만에 꺼내 읽었다. 까마득한 20대 언저리의 나는 일기장의 바래진 페이지 안에서 여전히 방황하며 살고 있었다.
흑백영화에 컬러를 입힌 것만 같이, 흐릿했던 그때의 내가 선명하게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시간여행자라도 된 듯, 30대의 내가 20대의 나를 오롯이 마주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들이 적혀 있었고, 사진으로만 추억하던 일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혀있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힘들어하지 말고 그 예쁜 날을 좀 더 즐겨보지 그랬어… 얘기해주고 싶었고, 지금과는 달리 용감무쌍했던 내가 기특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게는 달라도 비슷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다 자라지 못한 어른인 것만 같은데, 그래도 하고 싶다고 적었던 일들을 해낸 십오 년 후의 내가 근사해 보이기도 했다.
오래된 일기를 다 읽고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머리라도 얻어맞은 듯했다. 가슴이 콩 당거리고, 좋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던 용기와 열정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호주에 와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지내던 시간을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만든 건 결국 15년 전, 20년 전의 나였다. 4년이 지나도록 호주 생활에 마음 붙이지 못하던 때였다. 단절된 한국에서의 경력에 미련이 많았고, 해소되지 않는 여러 마음과 외로움이 마음에 타투처럼 남아 지워내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다 일기를 읽고 난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가장 젊은 지금 이 시간을 더 이상 후회와 눈물로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날들만 뒤돌아서 보고 있지만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 앞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자고, 긍정 에너지가 서서히 차올랐다. 되든 안되든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게 나였어!’
어제와 오늘은 똑같은데,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변함없이 하고 있는데, 내 마음이 달라지고 나니, 정말 판에 박힌 표현이지만 일상의 온도가 달라졌다. 가뭄이 심했던 마음에 소나기라도 내리듯, 몇 년 동안 안 읽히던 책들도 이제는 쌓아두고 읽는다.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야자시간에 수학 문제 대신 소설책을 붙잡고 있던, 글쓰기를 좋아하던 감성 가득한 고등학생으로.
지금 남기는 글들을 다시 10년이 지나 읽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글 쓰는 일에 주저하지 않게 됐다. 40대의 어느 날, 다시 어떤 힘든 일 앞에 좌절하고 있을 때, 30대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살아낸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2020년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용기를 전하는 마음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