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에 <품바>라는, 당시로서는듣지도 보지도 못한 1인 14역 연극이혜성처럼 나타나 서울 한복판에서 공연되었어요.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자유당 말기까지 전국을 거지로 떠돌며 살다가 전남 무안군 일로읍의 걸인촌(乞人村)에 정착한 각설이패 대장 천장근의 인생 역정을 담은 마당극 형식.
고 김시라의 각본과 연출. 공연 시간 90분.
무대에는 북을 치는 고수 한 사람과 연기자 한 사람이 전부.
하지만, 1인 14역을 맡은 각설이의 걸쭉한 입담과 타령, 익살스러운 몸짓과 춤사위, 고수의 신명 나는 장단, 관객을 참여시키는 마당극 형식에 현실 정치풍자까지어우러져 폭발적인 공연장으로 바뀝니다.
90분 내내 관객은 웃다가 엄숙해지다가, 울분을 터뜨리다가를 반복하지요.
1996년에는 한국 연극사상 최초 최장기 공연, 최대관객 동원으로 ‘한국기네스북’에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1981년 초연된 <품바>. 제1대 품바인 정규수의 오리지널 공연을 담은 CD 표지.
놀랍게도 <품바>는 오늘날까지 전국 지자체 축제 무대의 단골이자 최고 인기 공연으로 사랑받고 있더군요. 등록된 공연자 수가 2017년 기준, 400명! 해마다 최고의 품바를 뽑는 전국경연대회가 열리고 있다네요.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 독립투사를 잡기 위해 탐문수사를 나온 일본 순사에게 말끝마다 '나리'라는 존칭을 붙이던 주인공. 순사가 돌아가자마자 등뒤에 대고 '나리 나리 개~나리' 라고 놀려댑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주인공이 참나리인데요. 서두를 <품바>와 개나리가 차지하고 말았네요. 기억의 편린이란 통제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임이 분명하군요.
말이 나온 김에 개나리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이고요. 참나리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나무와 풀의 차이? 옆으로 뚱뚱해지는 건 나무, 그렇지 않은 건 풀. 따라서 나이테 있는 건 나무, 없는 건 풀.겉껍질이 있는 건 나무, 없는 건 풀ᆢ.
개-가 붙은 식물은 약간 가짜, 못난이, 먹을 수 없다는비하의 의미가, 참-이 붙은 식물은 진짜, 식용가능이라는 존중의 의미가 담겨있어요.
바닷가에서 자생하는 참나리.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각설하고, 참나리 이름 유래부터. 그냥 나리 혹은 나리꽃이라고 부르는데요. 예부터 꽃 중의 꽃으로 여겨 '나으리'라 했던 게 '나리'로 변했다는 설, 들어보시죠.
"조선시대 고관대작을 이르는 '나으리'의 줄임말인 '나리'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렴결백한 훌륭한 관리는 참나리, 탐관오리는 개나리라 했다고 합니다."
- 이성권, <노컷뉴스>
개나리에서 참나리로 개명되었다는 설.
"옛날부터 약용이나 구황식물로 쓰인 참나리는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글 창제 이전 문헌에는 '개나리'의 이두식 표기인 '犬乃里花(견내리화, 향약구급방·1236)' '犬伊日(견이일, 향약채취월령·1431)' 등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동의보감(1613)', '산림경제(1715)', '해동농서(1799)' 등에는 대부분 개나리로 기록되어 있다. 개나리는 '개나리나무'에서 유래했다지만 기왕에 개나리로 부르던 식물을 참나리로 선택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 서효원, <한국일보>
원래 이름은 개나리였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참나리로 개명(改名)되었다는 겁니다.
동식물의 이름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케 하는군요.
참나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우리는 백합(百合)처럼 생긴 식물을 '나리'라 부르는데요.
정작식물도감에 '나리'는 없고, 이름뒤에
'나리'가 붙은 건 매우 많아요.
노랑참나리.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우선 '-나리'의 특성들만 살펴보지요.
꽃잎은 6장이고 서로 대칭. 수술은 T자 모양. 잎은 세로로 나란한 나란히맥.땅속에 있어 안 보이지만, 비늘처럼 조각조각 떨어지는 인경(鱗莖: 비늘줄기)이라 부르는 알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나리'가 들어간 식물이 국내에는 67종이나 된답니다.이름이 제각각이지만, 대충 알아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키도 꽃도 가장 크며, 꽃잎에 진한 갈색 점이 박혀 있는 나리 중의 나리는 '참나리'.
꽃이 하늘을 보고 피는 '하늘나리',
땅을 보고 피면 '땅나리',
중간을 보고 있는 나리는 '중나리',
중간을 보고 있으면서 털이 있는 것은 '털중나리',
잎이 줄기 중간에서 돌려나는 나리는 '말나리',
잎이 돌려나면서 꽃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늘말나리',
울릉도에서 자라는 '섬말나리',
잎이 솔잎처럼 가는 '솔나리'.
이 모두가 백합(百合)과로 분류됩니다. 백합이란 꽃이 희어서(白) 백합이 아니고요.땅속에 있는 알뿌리(비늘줄기)가 100개(百)나 될 만큼 많이 합쳐져(合) 있다는 뜻의 백합(百合).
오늘의 주인공 참나리는 산과 들의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요. 키는 1~2m. 잎은 녹색으로 두터우며 뾰족한 바소꼴. 잎겨드랑이에 완두콩 크기의 까만색 주아(珠芽)가 달립니다.
꽃은 7~8월에 주먹만 하게 펴요. 6장의 꽃잎이 뒤로 젖혀져 동그랗게 말립니다. 노란빛이 도는 주홍색 꽃잎엔 주근깨 같은 점들이 다닥다닥 박혀 호피 무늬를 이룹니다. 6개의 흑자색 수술과 머리가 붉은 1개의 암술이 길게 뻗어 나옵니다.
잎겨드랑이에 얹혀있는 주아. 가운데 1개의 빨간 암술을 6개의 수술이 둘러싼다.
참나리꽃은 화려한 데다 암술과 수술도 멋지지만, 열매를 잘 맺지는 못해요.
일단열매를 맺으면씨앗으로 번식이 가능합니다.
앞에서 말한 주아, 즉 '살눈'이 땅에 떨어져 이듬해 싹을 틔우기도 하고요.
땅속 비늘줄기로도 번식해요. 결국 씨앗, 살눈, 뿌리 세 가지 방식으로 번식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번식 방식 또한 매우 정교한 전략을 갖고 있어요.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이 얼마나 투철한지 살펴볼까요?
먼저 꽃부터. 저렇게 고개를 숙여 자기 발밑을 쳐다보고 있으면 곤충들이 내려앉을 자리가 없겠죠? 붉은색을 유난히 좋아하고, 긴 빨대를 가진 호랑나비만접근이가능하대요.
화려한 무늬의 호랑나비는날개의비늘가루가 기왓장처럼 포개진인시류(鱗翅類)에 속하는데요.
그 날개는 먼지나 물기와 같은 이물질이 붙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완벽 방진, 완벽 방수기능을 갖춘 거죠.
참나리는 이 멋진 호랑나비 날개에 수술머리에 있는 꽃가루를 붙여야만 하는데요. 먼저 끄트머리를 T자형으로 만들어 면적을 넓혀놓고, 그 끝이 상하좌우로 잘 움직일 수 있게 해 놓았죠. 자루걸레나 진공청소기의 흡입구처럼요.그래서 어느 각도에서 접근하든 꽃가루를 묻힐 수 있습니다.
긴 암술과 수술은 호랑나비가 대롱처럼 생긴 기다란 입으로 꿀을 빠는 동안 몸통 지지대 역할을 해준다. 일러스트= <풀들의 전략> 촬영.
저토록 긴 암술과 수술은 호랑나비가 대롱처럼 생긴 기다란 입으로 꿀을 빠는 동안 몸통 지지대 역할을 해줘요.
꽃가루는 접착성이 매우 강해서, 호랑나비 날개에 붙을 수 있어요.
만져보면 끈적하고,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호랑나비는 적갈색 꽃가루를 날개에 묻혀스타일을 구긴 채, 다른 꽃으로 향하는 겁니다.
다음은 주아 즉, 살눈. 참나리는 나중에 꽃무게를 못 이기겠다는 듯 땅으로 쓰러지고 마는데요. 이는 잎겨드랑이에 얹혀져 있는 주아를 확실하게 땅으로 내려놓기 위한 전략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다 익은 주아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톡 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끝으로 뿌리. 백합과는 뿌리에 전분이 많아 이를 노리는 동물들이 많아요. 인간도 그중 하나죠. 뿌리를세 종류나 갖고 있는데요.
통상적으로 물과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는 맨위에, 영양분이 많아번식이 가능한 알뿌리가 그 아래에 있어요.
그 알뿌리 밑에는 견인근(牽引根)이 있어서, 알뿌리를 땅 속 깊이 끌어내립니다.
알뿌리가 건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약탈자의 손길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한 눈물겨운 전략이기도 하지요.
비늘 조각처럼 포개진 수많은 작은 알뿌리는 쉽게 흩어지는 구조로 뭉쳐있는데요. 멧돼지가 파먹거나 인간이 캐내더라도, 그 일부는 남아번식할 수 있습니다.
뿌리도 3종류. 중간의 알뿌리를 보호하는 게 핵심 포인트. 일러스트= <풀들의 전략> 촬영
봄에 나오는 새싹 또한 알뿌리에서 수직 방향으로 나오지 않아요. 땅속에서 뿌리가일단 옆으로 뻗었다가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새싹을낸답니다. 알뿌리를 은폐하고 엄호하는전략이지요.
유비무환의 화신, 맞지요?
이상의 내용은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풀들의 전략>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참나물, 참나무, 참마, 참취처럼
'참' 자가 들은 건 대개 먹을 수 있습니다.참나리의주아도 찐 뒤에 말려서먹고, 알뿌리 역시 아릿하니맛이 좋고 영양분이 많으니 인간과 동물의 먹잇감이 될수밖에요.
학명은 릴리움 란키폴리움(Lilium lancifolium).
속명 '릴리움(Lilium)'은 나리(lily)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라틴어 이름. 종소명 '란키폴리움(lancifolium)'은 긴 창(lance)의 뜻을 가진 '란케아(lancea)'와 잎(leaf)의 뜻을 가진 '폴리움(folium)'의 합성어로 '길고 뾰족한 잎'이라는 뜻.
별명도 많지요.
붉은 꽃이 말려 있다는 뜻의 권단(卷丹), 호피백합(虎皮百合), 홍백합(紅百合), 약백합(藥百合), 백합(百合), 나리, 알나리, 당개나리.
참나리의 영어명은 타이거 릴리(Tiger lily). 꽃잎이 호랑이 무늬인 때문이겠지요.
꽃말은 깨끗한 마음, 순결.
참나리의 어린순은 나물로, 알뿌리는 볶아 먹는답니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알뿌리를 삶거나 구워 먹었고, 쌀을 섞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대요. 날로 먹어도 되고, 꿀에 재서 먹거나, 시루떡에 넣기도 한답니다. 국수의 재료로도 쓰였고요.
까만 콩처럼 생긴 주아는 쌀과 함께 밥을 지어먹기도 했답니다
꽃잎으로 담근 술은 빛깔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기력을 왕성하게 해 준다네요.
한방에선 알뿌리는백합(百合), 꽃은 백합화(百合花), 종자는 백합자(百合子)라는 이름으로 사용 한답니다.
진해, 천식, 해열제로 써요.
민간에선 자양강장제로 인기고요.
■ 백합의 속명 릴리움(Lilium)은 라틴어 Li(희다), lium(꽃)의 합성어로, 유럽에 서식하는 순백색의 성모백합, 즉 마돈나 릴리(Madona Lily, 학명 Lilium candidum)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요.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수태고지(受胎告知)그림에는 항상 이 백합이 나오는데요.이 꽃은 일백 백(百)이 아닌 흰 백(白)의 백합화(白合花)로 표기하기도 해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합니다.
거의 모든 나리 종류의 꽃말에 들어가는 '순결'은바로이 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교의 백합화는 불교의 연꽃과 마찬가지로 아주 신성시하였으며 일약 세계의 명화가 되었다."
- 문일평, <호암전집>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가브리엘 대천사가 흰 백합 꽃을 들고 있다. 우피치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