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들에게 1면 톱 기사란 위기이자 기회란 의미가 있다. 일단 그날 게재되는 기사 중에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고 영향력 있는 기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1면에 통상 들어가는 기사는 단 4개이고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나름 기자로선 영광(?)스러운 일이다. 실제 노점 가판대에 신문이 많이 꽂혀 있던 시절에는 절반으로 접힌 신문, 제호 밑에 톱 기사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 기사에서 내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지인들이 연락이 오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물론 네이버 뉴스 상단에 걸려야 지인들이 연락이 오지만.
우리 회사는 통상 기자가 300명이고 필드에서 뛰는 기자가 그 중 절반이어서 사실 1면 기사를 쓰는 날이 적지는 않다. 하지만 예전에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에게 들어보니 기자 수가 1000명 정도이고 지방순환 근무를 하는 기자들에겐 1면 톱을 쓰는 일이 많지 않아서 통상 스크랩을 해두고 기념으로 삼는다고 한다.
특히 기자들에게 특종 기사를 1면 톱으로, 그리고 ‘일톱삼박’으로 불리는 1면 톱 기사와 3면에 박스 기사 3개로 전면을 쓰는 일은 훈장처럼 남는다.
내가 처음 단독 기사로 1면 톱 기사를 쓴 건 2008년 7월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보단체들에서 광우병과 관련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여중생까지 집회에 등장하면서 반향이 컸고 식량 주권에 대한 요구와 목소리는 컸다. 하지만 이 집회는 진보성향 단체들이 결합하면서 조금씩 변질됐고 곧 정권 퇴진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과한 측면이 컸고 폭력 시위로까지 번졌다.
5월 수습기간이 끝난 뒤 사회부 사건팀으로 배치받았다. 동기 1명과 함께 사건팀 막내가 됐다. 중부라인을 맡았지만 5월부터 쇠고기 집회가 시작되면서 나는 사실상 집회 전문 기자가 됐다. 처음엔 주말에만 하던 집회는 어느 순간부터 매일 이어졌고 오전엔 경찰서에 나가있다가 오후에는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대를 따라다니는 게 일상이 됐다.
어느 순간부터 시위는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시민들이 대다수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그저 광장의 매력에 빠진 이들, 또는 술취한 행인들, 전문시위꾼들이 몰리면서 혼잡한 양상이었다. 이를 주도한 단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도 이들을 선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느덧 정권퇴진을 주장했는데 불과 취임한 지 석달 만에 국민 스스로 뽑은 대통령을 물러나라고 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들에겐 대화와 토론보다는 반대와 선동 뿐이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부정하는 진보단체에 대한 실망감은 컸다. 진보와 보수 성향 언론사별로 논조의 차이는 컸다. 우리 회사에도 시위대들이 붙여놓은 스티커로 도배가 된 적이 있었고 사진부 선배는 시위대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는 등 아수라장이었다.
내 기사는 점점 시위대를 비판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최 측은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7월 말 이른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홈페이지에 광화문 상인들에 대한 명단이 올라왔다.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광화문 일대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은 컸다. 석달 가까이 시위가 이어지면서 교통이 막히는 등 혼잡한 상황이 이어지자 나들이객과 관광객들의 발길은 줄어들었고 매출이 떨어졌다. 이들은 시위를 비판하는 보수 성향 변호사단체를 통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그런데 이 소장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인터넷에 공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 상인들의 이름과 상호명, 주소, 인터넷홈페이지까지 게시돼있었다. 이성을 잃은 시위대들이 실제 폭력은 물론 사이버테러의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실제 확인해와보니 일부가 그런 협박을 하고 있었다.
오후 발제를 만들어 캡에게 보고했다. 관련된 기사가 아직 나온 적은 없었다. 단독 기사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오후 편집회의에서 1면 톱 기사로 잡혔다. 원고지 200자 6장, 1200자짜리 기사를 쓰는데도 긴장됐다. 그래픽용으로 관련 댓글을 몇 개 골라 올리고 정신없이 기사를 써서 보냈다. 데스크를 거쳐 기사는 ‘소송 상인 이름-주소 공개 “망하게 하자” 사이버테러’라는 제목으로 나갔다.
바로 하나 윗 기수의 친한 선배는 그날 “축하한다”며 “이런 날엔 술을 마셔야 된다”며 바람을 잡았고 그날 회사에 들어왔던 캡 이하 선배들과 진탕 마셨다.
다음날 기자실은 경쟁지 중심으로 발칵 뒤집었다. 한 타사 동기는 나한테 선배들한테 엄청 깨졌다고 호소하며 취재원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이 사건은 그 뒤 경찰 수사로 이어져서 이를 유포한 이들은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등 혐의로 붙잡혔다.
그 뒤에도 회사 옆 건물 지하에 있던 한 호프집 사장은 한 두 해 안에 결국 문을 닫았다. 그때 발생한 손실이 컸기 때문이라고는 나도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위를 주도하고 참여했던 몇몇은 몇 년 뒤 국회의원이 됐다. 나는 실체도 알 수 없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을 조장했던 그들과 교류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세상은 회색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