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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러기퐝 Oct 21. 2020

특강

초년병4

  2009년 어느 날의 일이다. 캡의 전화를 받았는데 한 서울 소재 여대에서 특강을 하라는 것이었다. 사진부 전문기자 선배가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데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기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미혼 남자 기자를 보내겠다”는 캡의 구상에 따라 그냥 가게 됐다.
  그 뒤로 10년이 넘었는데도 사실 강의를 해본 적은 없다. 그날은 거의 당일 통보를 받았는지라 뭔가 자료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강연을 요청한 사진부 선배도 주로 질문 위주로 답변하면 된다고 했다.
  오랜만에 가게 된 대학 캠퍼스, 처음 들어가 본 그 여대 캠퍼스는 기분만으로도 젊은 기운이랄까, 생기가 넘쳤다. 그때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으니 나는 아무래도 학생 테는 벗었고 이제 갓 스무살이나 20대 초반인 학생들은 어린 테가 남아 있었다.
  100명 넘게 모인 강의실 강단에 서니 적지 않게 떨렸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도움이 될까? 가는 동안 미리 준비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내가 던진 첫 마디는 대략 이랬다.
  “안녕하세요. OO일보 OOO 기자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많이 떨리네요? 여러분, OO일보 기자라고 하면 도깨비처럼 생겼을 것으로 생각하셨을텐데 꼭 그런 건 아니지요?”
  뭐 이런 요지의 인사말이었는데, 한마디로 사람들이 역사가 오래된 언론의 기자라고 하면 도깨비인 줄 아는데 내가 도깨비처럼 생기지는 않았지 않느냐 이런 것이었다. 그나마 좌중은 웃음이 나왔다. 일단 성공.
  그러나 준비한 게 없어서 바로 질의응답으로 넘어갔다. 10년 넘는 일이라 학생들의 질문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딱 하나 생각나는 질문.
  “기자님이 쓰신 기사는 모두 기자님 생각대로 쓰신 건가요? 쓰고 싶지 않은 기사를 쓰신 적은 없나요? 위에 데스크들이 기사를 많이 고치진 않나요?”
  예상했던 질문이고 주변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 많이 물어보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1년 넘게 사회부 기자로, 특히 광우병 시위를 거치면서 고민이 많아 자문했던 물음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해답은 있었다.
 
  20대에 나는 지식인이 되고 싶었다. (어느 선배는 지식인 중에서도 실천을 하는 게 지성인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나는 거의 명목만 유지하던 마지막 운동권 선배들과 만났고, 나는 지적 호기심에 대학시절 집회에도 종종 나가봤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구호를 외치는가. 왜 이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민주화와 항쟁, 거리의 투쟁은 국민의 승리로 각인돼 있었고 성공한 역사로 평가돼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운동권 선배들과 심리적 거리감이 컸다.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종교와 같다고 생각했다. 선구자적 시각에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고 같은 운동권 내부에서도 분파로 갈라지고 비판하고 싸우는 행태를 보면서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 부류에 끼지는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북유럽 국가 어디쯤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명과 사회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는 의료와 교육은 무상으로, 그게 안 되더라도 최대한 국가가 커버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복지국가가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이념적으론 중도진보 정도에 해당했겠지만 조중동 프레임은 너무 싫었다.


 “나는 그 ‘진보’라는 딱지를 계속 달고 싶어 했었다. 지금의 나는 현재진행형인 사건을 맞이하고 있고, 포장된 것과 까발려진 것 사이에서 극단과 극단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쓰게 된다. 현재진행형이기에 어떤 평가로 귀결될지 알 수 없고, 기왕이면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싶되 기사에 필요한 것은 야마이다. 균형적인 기사는 사실 기사로서 비효율적이기 때문. 결국 벌어지고 있는 것은 전쟁이다. 언론과 언론은 각자의 정치적인 위치에 맞춰서 서로의 지지자에 의지하고 그들을 포장하며 그 반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비하한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공격과 방어를 해대고 나니 남는 것은 피폐해진 몸과 자기방어의 논리와 그리고 한 켠의 반성. 누가 약자이고 누가 강자인지. 이 사건 속에서 누가 타격을 받고 누가 이해를 얻는지 지켜보고 있으면 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많이 몰랐구나 싶기도 하다. 무엇이 순수한 시민이었고, 배후였으며, 또 시민혁명이니 민주주의의 도약이었을까. 어린 학생들이 나온 것이 진정 미 쇠고기 먹고 죽기 싫다는 거였고, 스타들의 발언과 참여에 휘둘린 팬클럽소녀들이었을까. 집회 현장을 차지하고 있던 관찰자로서는 어느 쪽에도 포지셔닝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장에서는 진정한 진보도 보수도 없었다. 그냥 생물 같은 사건에 이끌려서 어떻게 커져나갈지 작아질지 모르는 가운데 치고받고 돌아가는 싸움 뿐. 낭만적 혁명주의도, 감성적 민주주의도, 반대를 위한 반대도 너무 소모적이다.”
-2008년 일기 중


  아마 나는 어린 친구들 앞에서 경험으로 뒤바뀐 생각, 정론지를 추구하는 한국 언론,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기사의 야마 등 구조적인 변명을 했을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고민은 많이 사라졌다. 더 이상 진보냐 보수냐가 의미없는 이념스펙트럼이 되어서 일까. 아니면 친문이냐 문파냐 아니냐 등이 더 중요한 틀이 돼버린 결과일까. 정치학자들조차 한국의 민주당을 진보정당으로 규정하지 않아서일까.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 등 민정계열 정당은 보수정당으로 불리지만 민주당 등 민주계열 정당은 진보 중도진보에서 중도, 중도보수 어느 사이쯤 놓여있다고 평가된다.
  나는 우리 회사가 보수지로, 내가 보수지 기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싫다. 하지만 이제 나도 진보적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이제 40세가 넘어서인 걸까.

  

  어쨌거나 그날 1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강의실을 나오는데 학생회장이라는 학생이 나에게 봉투를 줬다. 강연료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강연료를 받을 만큼의 강의가 아니었다"고 고사했지만 학생회인지 학과 예산에 편성됐다고 하면서 안주면 안된다기에 받았다. 그러면서 "그럼 나중에 강연료로 치킨을 한 번 사겠으니 혹시 언론에 관심있는 학생들과 함께 연락달라"고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연락은 없었다. 당연히 먼저 하지도 않았다. 얼마전 우연히 휴대전화 연락처를 보다가 그 학생회장 연락처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친구는 무슨일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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