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동 Aug 16. 2022

이렇게 놀러 다녀도 재밌어요

밥 먹기 힘들다



습한 공기. 눈앞엔 야자나무가 펼쳐져 있다. 타국에 온 기분이다. 유심 칩을 교체할 필요는 없다. 포켓 와이파이는 더더욱. 왜? 그야 제주도는 한국이니까.


누가 이 나무를 보고 한국이라 상상할꼬



자주 만나는 사람들한테만 제주도행을 이야기했다. 사실 누구라도 고작 제주도 간다고 사방팔방 떠들진 않겠지. 그래도 출발하는 날 공항에서 인스타그램 스토리 정도는 올리는 편이다. 들뜨기도 하고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공항은 어쨌든 어디론가 떠나기 위한 장소여서인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들뜬 공기에 편승해 신나는 노래도 틀어본다. 대놓고 여행 떠난다 부르짖는 음악은 또 아니다. 학부 시절 교수님의 교육에 세뇌된 탓일까. 그는 기자의 주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그 의도를 알아차리도록 쓰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당시엔 왠지 그 말이 멋졌고, 꼭 글이 아닌 다른 분야에도 그 지론을 적용했다. 맨날 지 하고 싶은 말만 잔뜩 뱉어내면서 뭔 소리 하냐고? 이건 내 에세이이니 내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닐까? 어쨌든 나는 스탠 게츠와 주앙 질베르토의 우주명반 <Getz/Gilbeto>을 선곡했다. 여름에 ‘The Girl from Ipanema’ 안 듣는 그런 사람과는 낭만을 논할 수 없다. 이파네마 커피를 마셔도 참작은 불가능하니 그리 아시고. 트랙을 다섯 개쯤 들었을까, 어느새 비행기가 왔다.


언제나 설레이는 광경


착륙 후 공항에서 휴대전화 확인하니 메시지가 와 있다. ‘제주 갔구나.’ ‘응.’ ‘부럽네.’ ‘니도 오던가.’ ‘뭐 하러 갔어?’ ‘그냥 왔어. 책이나 좀 읽다 돌아가려고.’ ‘힐링하겠네.’ 힐링. 힐링. 그놈의 힐링. 대체 이 근본 없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뭐야? 고등학교 때인가 처음 본 단어 같으니 10년도 더 됐지 아마. 나 혼자 알아들을 법한 이상한 말 만들고 말장난 치는 건 좋아하면서도 힐링이나 애정하다 같이 대중적으로 오용하는 단어와는 왠지 거리를 두고 싶어. 힐링의 사전적 정의는 몸이나 마음의 치유인데, 나는 심신을 치료받을 만큼 힘들지가 않아. 아무래도 자기합리화로 가득해. 이 단어는 일해야 하는, 혹은 덜 먹어야 하는 사람이 그냥 실컷 놀고 잔뜩 먹으면서 생기는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거 아냐? ‘그래, 나에겐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라며 본인의 불편함을 덜어내는 거지. 진짜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면 그냥 무위도식하는 것처럼 느껴질 걸?이라고 답장에 잔뜩 쏟아내 버리면 분명 신경 곤두선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이겠지. ‘그런가? ㅎㅎ’ 정도로 답신해야겠다. 모처럼의 망중한이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 ‘짬 내서 제주도나 다녀올까’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을 무렵 한창 빠져있던 음식은 간짜장이었다. 쉬는 날마다 서울과 경기 남부권을 들쑤시며 간짜장 이상형을 찾아 헤맸다. 면은 수타일 것. 물기 없이 잘 볶인 야채에서 은은한 단맛과 고소한 감칠맛이 올라올 것. 잘 튀긴 달걀 후라이 하나 올라와 있다면 금상첨화. 몇 군데 훌륭한 곳을 찾았으나 수도권의 인구 밀집도를 고려해봤을 때 턱없이 부족했다. 국내 여행 가면 꼭 간짜장 한 그릇은 먹어야지 하는 일념으로 온갖 수단 동원해 검색해서 네이버 지도에 저장해뒀다. 제주시에는 유일반점과 홍보석 두 군데가 있다. 유일반점은 가 봤으니 이번엔 홍보석이다. 마침 제주공항에서 버스 타면 금방이라 여행 첫 끼니로 딱이다. 식사 마치고 숙소에 짐 풀면 딱 시간이 맞으리라. 계획 그까짓 거 공항에서 버스 기다리면서 짜도 충분하지. 역시 나 이재동. 프로다 프로.


연동주민센터에서 내려 걷는다. 노른자 툭 터트릴 생각에 신호 느리게 바뀌는 횡단보도도 기다릴만하다. 이 땡볕 견디면 보상이 오겠지. 지도를 보니 정확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비빔박자를 탄다. 이윽고 문 앞. 색바랜 간판에 붓글씨 폰트로 얹힌 紅홍 寶보 石석은 정확히 찾아왔음을 일깨우는데 샷다(셔터가 표준말인 건 알고 있음)가 내려져 있다. 이상하다. 분명 지도에는 쉬는 날 없던데. 쎄한 기분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뭐가 첫 단추고 뭐가 계획 그까짓 거 나 이재동이야. 단추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데 속없게 배는 고파온다. 기상 후 목구멍에 음식 하나 넣어준 기억 없으니 실제 속에 아무것도 없기도 하다. 예상 밖의 일이라 일정을 황급히 변경한다. 이왕 중화요리 먹기로 한 거 만두 땡긴다. 걸어서 20분쯤 가면 봐둔 만두집이 하나 있으니 그리로 향한다. 비 온다더니 덥기만 무진장 덥다. 오토바이 렌트 안 한 걸 후회한들 뭐하리. 이미 파월도 놀랄 자이언트 스텝을 밟았는데.


연동 걷다 웃긴 간판 발견. 놓칠 수 없다.


패션도 유행이 있듯 중국집 이름에도 유행이 있다. 끝에 각, 루, 원, 성, 각 등 어떤 글자로 마무리되는지를 보면 언제쯤 생긴 업장이겠거니 짐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글자별 시기도 알고 있었는데 그건 다 잊어버렸으니 제쳐두자. 어쨌든, 저 유행과는 완전 다른 이름이면 보통은 화교가 운영하는 식당 혹은 배달 전문점이다. 홍보석 다음 타자인 십원향이 화교가 운영하는 케이스다. 매장 들어서면 한국말 전혀 못하는 중국 부부가 나를 맞이한다. 어느 나라 말로 인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두 부부의 흔들리는 동공에서 나와 같은 심정임을 알아챈다. 우렁찬 ‘안녕하세요!’ 다섯 글자로 한국인임을 공표 후 자리에 앉았다. 기세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씩 다 주세요’였으나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니 위로 내 아래로는 없어져야 할 군대 부조리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심사숙고 끝 양파군만두를 골랐다. 이제 주문해야 하니까 사람을 불러야 하는데 뭐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모? 이건 좀 아니고. 따거? 약간 취권 느낌이라 별로고. 이거저거 고르다가 입에서 나온 건 한국어도 중국어도 아닌 무국적 음파였다. 정말 아무 의미 담기지 않은 소리를 냈는데 그걸 부르는 것으로 알아들은 여자 사장님이 주문을 받으러 오셨다. 검지로 양파군만두 가리켰다. “이거 주세요” 무슨 말인진 모르겠어도 고개를 끄덕했으니 주문 잘 들어갔겠지. 기다린다.


드디어 밥 먹는다. 감격의 한 컷


오 분을 기다려도 만두 굽는 소리 그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아 하염없이 휴대폰만 바라본다.평소엔 잘 보지도 않던 인스타그램 돋보기 칸을 의미없이 들여다본다. 마침내 ‘치이익’ 주방에서 만두 올려지는 소리가 들린다. 잘 달궈진 후라이팬에 양파만두를 빈틈없이 끼워넣었으리. 내 주문 잘못되지 않았구나. 안도감에 이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선반에 있는 생맥잔엔 찻잎이 잔뜩 우려져 있다. 저 부부는 정말 중국 사람이 맞았구나 실감한다. 차 한 잔 줄 수 있냐고 하는 건 중국어로 뭘까 생각할 즈음 기름이 밀가루 만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명절 전 부치는 냄새와 비슷하나 계란 비린내가 없는 것이 좀 다르다. 곧이어 만두가 나왔다.


프렌치 프레스인줄 알았다. 커피에 절여진 뇌.


흔한 통념, 중국 음식은 기름지다라는 것을 정면돌파하는 듯한 군만두가 내 밥상 위로 등장한다. 최소한의 기름을 사용해 구운 듯한 저 그을린 색은 여태 봐왔던 화교 만두들과도 조금 차이가 있다. 인도의 파라따 혹은 난이나 찹쌀 탕수육을 연상케 하는 이 양파군만두. The Dark side of the Dumpling을 감상하고 있으니 여자 사장님께서 손발짓 동원해가며 나에게 무언가 설명하려 애쓴다. 입을 앙 벌리시고 씹는 듯한 모션을 취하더니 손가락으로 X자를 연신 친다. 뜨거우니 천천히 먹으라는 거 같은데 확신이 없어 고개를 갸우뚱한다. 답답하셨는지 남자 사장님도 설명에 가세한다. 입을 벌리시고 씹는 듯한 모션까지는 똑같은데 디테일이 추가있다. 입을 하~ 하~ 하시며 구내에 손부채질을 한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먹으라는 소리가 확실하다. 검지와 엄지 모아 오케이 사인 보내주고 만두를 입가로 가져간다. 안심하슈, 내 한입에는 넣지 않것슈. 만두 끝부분만 조금 먹고 육즙을 먼저 빨아먹는다. 제법 뜨겁지만 쥬시한 육즙 양파 향과 섞여 들어온다. 더 나올 게 없겠다 싶을 즈음에서야 만두 본체를 입 안으로 넣었다. 모든 과정은 아이 컨택트와 함께 이루어졌다. 뜨겁지 않은 만두를 꼭꼭 씹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제서야 두 부부는 편안한 얼굴로 내게서 걱정 어린 시선을 거둔다. 본격적으로 만두에 젓가락 들이댄다. 내용물도 내용물인데 만두피 식감이 참 남다르다. 잘 튀긴 알새우칩 같은데 입천장 나갈 정도로 딱딱하진 않다. 아스락 씹히면서도 쫀득한 것이 과연 본토 만두다 실감케 한다. 만두소야 말할 것도 없다. 육즙 팡팡 양파 단맛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바로 업로드. 나만 알기는 미안한 집이다.


눈으로 봐도 느껴지는 저 질감.


배는 부른데 한 종류 더 먹고 싶다. 반 접시 되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문득 <헤어질 결심> 생각난다. 어눌한 한국말 하다가 막히면 번역기 돌리던 탕웨이 빙의하여 구글 번역 앱을 켰다. ‘만두가 정말 맛있습니다. 다른 만두는 무슨 맛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배가 아직 덜 불러서 더 먹어보고 싶은데 한 접시는 너무 많습니다. 어떻게 샐러리 물만두 반 접시 안될까요?’ 중국어로 번역된 걸 재차 한국어로 번역해 검증해봐도 의미가 달라지진 않는다. 심장을 가지고 싶다는 그런 오해는 없으리란 확신. “사장님!” 부르자 여자 사장님이 나온다. 그녀에게 핸드폰 화면 속 중국어 보여준다. 남자 사장님과 사뭇 진지한 대화가 오고간다. 오케이 싸인 떨어지고 조리를 하러 다시 주방에 들어가는 여사장님. 동행이 있는 여행이었다면 편하게 두 접시 시켰겠지만 혼자니 어쩔 수 없다. 반대로 둘이었면 이런 번역기 같은 상상 하지도 않았겠지. 이게 묘미다.


극적타결 샐러리 물만두. 중국만두는 피가 두껍다.


띵동. DM이다. 내게 십원향을 알려준 분의 연락이다. 아까 올린 스토리 답장이다. ‘어때 맛있지?’ ‘예 너무 맛있어요 형. 감사합니다.’ 이 형님이 또 중국어도 몇마디 할 줄 안다는 게 기억난다. ‘그런데 맛있게 먹었어요는 중국어로 뭐라 해요?’ ‘훼이 창 하오 츠 해봐 재동아’ 샐러리 물만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감사 인사 하나 배웠다. 물만두라 그런지 금방 내 테이블로 접시 하나 올려진다. 이자카야에서 술안주 정도로 나오는 양이라 딱 적당하다. 역시 반 접시. 한 접시는 절대 다 못먹었을 터다. 됐고 일단 한입. 입안에서 터지는 샐러리의 그윽한 향. 말 거는 게, 혹은 흥정하는 게 부끄러워 이걸 안 먹고 나왔으면 정말 후회했을 게다.


“훼이 창 하오 츠!” 외치자 사장 내외가 웃는다. 뜬금없이 중국어 한마디 나오니 참았다는 듯 중국어를 쏟아내시며 대화를 건다.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 중간 중간 제주라고 하는 거 보니 대충 나더러 제주도 사냐고 물어보는 거 같다. “노 제주 노 제주. 서울 서울!” 물론 안양 살지만 안양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하니 일단 서울 사람인 척하는 거다. 아. 확실히 맞췄나보다. 말을 눈치로 알아들어도 문제다. 중국어 할 줄 아는 줄 아시는지 또 중국어 향연이다. 전집중 호흡으로 들어보니 중궈런 한궈런 들린다. “아 중궈런 아닌데 한궈런 한궈런 오리지날 한궈런” 하니까 내 말이 웃긴지 박장대소한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 주고받으며 만두 게눈 감추듯 흡입하자 또 놀란다. 배 만지면서 또 뭐라 하는 거 보니 배부르냐고 물어보는 듯하다. 배 매만질때마다 들리는 게 ‘바오’인 걸 보니 아무래도 배, 혹은 배부르다는 의미 같다. “바오 바오 완전 바오 빵빵” 또 웃음 한바탕. 내 엉터리 바디 랭귀지 실전 중국어가 재미있나 보다. 한참 웃으며 계산대로 갔다. 만 팔천 원. 사람 좋은 호방한 웃음 속에 감춰진 살벌한 가격. 그래도 맛있었으니 됐다. 서로 따봉 주고받으며 가게 밖으로 나선다. 배도 부르겠다. 이제 시작이다.

작가의 이전글 홈 바리스타를 위한 여름아이스 커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