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무교동 고려보쌈
가장 적당하고 정갈한 맛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종로 곳곳에 있는 식당과 비슷한 내부가 나온다.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찬다. 불쾌할 정도는 아니다. 식당이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지를 실감할 정도다. 시청 앞 회사원들이 값싸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식당이라는 게 느껴진다.
계단 밑에는 카운터가 있다. 카운터를 지나가면 좌측에는 방, 우측에는 홀이 나온다. 보통은 홀부터 먼저 채운 후 방을 채우는 듯하다. 방은 좌식이기 때문이다. 다닥다닥 붙어서 먹지만, 거리가 불편할 정도로 좁진 않다. 점심엔 정식을 많이 시켜서 먹기에 반찬이 미리 세팅돼 있다.
자리에 앉으면 곧바로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는다. 정식은 살만 또는 섞어로 나뉜다. 가격은 9000원. 살코기만 나오는 살만은 비계가 없이 퍽퍽한 부위만 나온다. 섞어는 비계와 살코기가 적절하게 섞여 있다. 취향 존중이지만, 개인적으로 보쌈은 무조건 섞어가 맞다고 생각한다. 비계는 보쌈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 중 하나다.
보쌈 정식의 반찬은 콩나물, 호박무침, 마늘 등이다. 매번 같진 않은 것 같다. 어떨 땐 나물무침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도 고기와 김치를 함께 먹기에 매우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저녁에는 사람들이 막국수와 파전을 많이 시킨다. 점심에도 주문이 불가능하진 않다. 막국수와 파전도 가격이 그렇게 비싸진 않다. 맛도 좋다. 보쌈이랑 같이 싸서 먹으면 조화롭다.
내부가 엄청 깔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더럽지만은 않다. 조금의 찝찝함을 견뎌낼 정도다. 여느 식당이랑 비슷하다. 주문을 하면 나갈 때 가지고 카운터로 가야 하는 영수증을 준다. 그리고 빠르면 5분, 늦어도 10분 안에는 음식이 나온다.
이제부턴 고기와 김치의 시간이다.
보쌈이 맛있기 위해선 고기와 김치의 적절한 조화가 필수다. 고기 자체가 맛있고 김치 자체가 맛있어도 둘이 어우러지지 못하면 불쾌하다.
고려보쌈은 겉만 봐선 투박해 보인다. 고기도 깔끔하게 잘려 나오지 않고, 어슷어슷 썰어서 나온다. 그래도 정갈하다. 그 이유는 김치 때문이다. 고려보쌈의 김치는 한식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한식의 '보쌈김치'에 해당한다. 거기에 고추양념이 버무려진 느낌이다. 너무 맵지 않고, 너무 짜지 않고 적당한 양념이 스며들었다. 너무 달지도 않다. 그야말로 정석 그 자체다.
고기 역시 최고봉이다. 돼지 잡내는 절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어떻게 돼지 잡내를 없앴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된장 향이 강하지도 않고, 마늘이나 월계수 향이 지나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커피나 설탕의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리 많은 재료를 넣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고기 색이 원색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된장이나 커피를 많이 넣은 고기는 고기 색이 갈색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마치 물로만 고기를 익힌 것처럼 하얗다. 동시에 짜지도, 달지도 않다. 잡내는 없고 부드럽다. 마치 오랜 시간 찜기에 넣고 찐 것 마냥 아름답게 혀를 장악한다.
달지도 짜지도 맵지도 않고 정갈하며 적당한 김치가 바로 이 고기와 잘 어우러진다. 고기가 부드러우니 정갈한 김치와 잘 어울릴 수밖에. 새우젓이나 쌈장은 필요 없다. 오직 고기 자체와 김치 자체의 맛만으로 혀를 지배할 수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다.
보쌈은 가끔 너무 많이 먹으면 물릴 때가 있다. 또 접시에 낀 기름으로 식욕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고려보쌈은 물리지도 않는다. 기름이 많이 끼지도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보쌈을 만드는지, 정말로 궁금할 정도다.
그렇게 다 먹고 나면 입 안에 여운이 남는다. 고기의 부드러움과 김치의 정갈함이 내부를 가득 채운다. 부대끼지도 않는다. 과하게 양념이 많이 들어있지 않기에 적당한 마무리가 가능하다. 양이 적진 않다. 오히려 많은 편이다. 그래도 배부르단 느낌보단 편안한 느낌이 강하다.
전통적인 맛이 강하기 때문이다. 김치도 정석, 고기도 정석. 과하게 무언가를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들어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영향이다. 그렇다고 너무 무(無) 맛도 아니다. 적당한 깔끔함과 적당한 자극. 그것이 고려보쌈을 설명하는 말이다.
여운을 남긴 채로 영수증을 들고 카운터로 향한다. 나가기 전에 카운터 옆에 있는 화장실을 들를 수 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간다. 그러면 시청 앞 광장이 나온다. 주변엔 카페가 즐비하다. 고려보쌈의 적당함을 안은 채로 카페에서 보쌈의 여운을 나눈다. 이곳은 누구를 데려가도 실패하지 않는다.
여운을 남기는 정갈한 맛, 고려보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