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위바위보쌈 Jun 08. 2023

부드러움과 깔끔함을 겸비한 천하의 보쌈

서울 종로구 원서동 천하보쌈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온 뒤 계동길을 쭉 따라가면 와인집 이잌이 나온다. 이잌을 끼고 오른쪽으로 간 후 법원이라는 바를 지나면 눈앞에 창덕궁이 보인다. 그 창덕궁에 다다르기 전,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 건너편에 천하보쌈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이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나름대로 느낌이 있다. 가정집에 들어온 것 같고, 오래된 시골 음식점을 간 것 같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친절한 남자 사장님이 자리를 안내해 준다. 아마 천하보쌈 주인의 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친절함을 따라서 자리에 앉으면 메뉴 고민의 시간이 다가온다.


천하보쌈은 정식을 판다. 특이하게도 보쌈(특) 정식을 판다. 불고기 정식이나 된장 백반, 낙지 요리도 있는데 보쌈집에서 다른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곳에선 안주류로 나오는 굴보쌈이나 낙지볶음보단 식사류인 보쌈 정식이 진리다. 적당한 가격(12000원, 예전엔 1만 원)에도 많은 양을 맛볼 수 있다. 아무래도 고기 부위가 삼겹살이 아닌 전지(돼지 앞다리)이기 때문에 적은 가격에도 양이 많은 듯싶다.


반찬으로는 잡채와 달걀찜이 나온다. 배추 무침과 감자채 볶음, 문어무침 같은 반찬도 나온다. 시골 음식점에 와서 한 끼 든든하게 먹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푸짐, 그 자체다.


묘미는 된장찌개다. 그리 양은 많지 않지만, 혼자서 먹기엔 충분하다. 간을 세게 하지도 않았고, 밥이랑 잘 어울린다. 자칫 느끼할 수도 있는 보쌈 백반에 조화를 선사한다.


주방에선 두 이모가 역할을 분배해서 보쌈과 김치를 그릇에 담는다. 한 분은 고기를 슥슥 썰고, 한 분은 김치를 쓱쓱 썰어서 준비를 마친다. 그러면 서빙하는 분이 그릇을 내어준다. 다 차려놓은 반찬 가운데에 보쌈이 나타난다.


이제부턴 고기와 김치의 시간이다.


보쌈은 수육과 김치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원칙. 천하보쌈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낸다. 함께 가는 그 누구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조화롭다. 비계와 살코기의 비율이 1:3으로 완벽하다.


너무 느끼하지도 않고, 너무 퍽퍽하지도 않다. 굳이 살 따로, 섞어 따로를 만들지 않아도 적절한 비율을 유지한다.


고기는 야들야들하다. 부드러움 그 자체다. 아마도 오랜 시간 고기를 삶은 영향으로 보인다. 부드러워 미칠 정도로 고기는 완벽에 가깝다. 내로라하는 보쌈집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고기다. 잡내 따윈 나지 않는다.


양념이 과하지도 않다. 고기가 부드럽거나 잡내가 나지 않기 위해선 양념이 과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종로에 있는 다수의 보쌈 집들이 그렇듯 여기도 고기 색이 하얗다. 적당한 향신료와 적절한 재료로 고기 잡내를 잡고 부드러움을 만든 것 같다.


김치는 일품에 가깝다. 깔끔하다. 매콤하지 않아도 깔끔함 그 자체다. 한식 요리의 '보쌈(김치)'을 만들 듯 기본적인 재료로 만들면서도, 특유의 양념을 넣은 듯하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야들야들한 고기와 만난다면 최고의 조합이다. 일부러 김치에 과한 양념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고기와 김치가 만났을 때 혀를 파고드는 그 조화를 선사한 셈이다.


시중에 여럿 그럴싸하게 보쌈을 흉내 내면서 무말랭이 정도 내놓는 음식점과 다르다. 그야말로 보쌈의 기본을 갖춘 집이다. 고기와 김치의 적절한 조화, 그리고 깔끔함. 여긴 믿고 먹어도 된다.


고기와 김치를 다 섭취하고 나면 괜스레 아쉽다. 그래도 백반이 백반이다 보니 배는 부르다. 하지만 느끼하지 않다. 더부룩하지도 않다. 편안함 그 자체다. 고려보쌈, 장수보쌈, 종로보쌈과 비슷한 느낌이다. 배부르면서도 편안함. 느끼하지 않고 집밥을 먹은 듯한 든든함.


천하보쌈의 매력은 고기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김치도 김치지만, 고기를 정성 들여 만든 티가 난다.


무엇보다 고기가 식었을 때 접시에 돼지기름이 굳지 않는다. 하얗게 굳어버린 기름을 보면 죄책감이 밀려오거나 먹은 음식이 불편하기도 한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얼마나 깔끔하게 고기를 만들면 이럴 수 있을까.


적당히 먹은 후 여운을 다 섭취했다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한다. 친절한 사장님의 인사를 받으면 맛은 한층 더 가미된다. 맛집의 필수조건은 역시 친절한 서비스다.


아쉬운 점은 화장실이 밖에 있고, 공용이라는 점. 그리고 좌식 정도. 그걸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만족스럽다.


보쌈을 다 먹고 든든하게 밖을 나서면 창경궁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후식처럼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서 걷다 보면 소화가 다 된다.


부드러움과 깔끔함이 만났을 때 느껴지는 시너지, 천하보쌈이다.

이전 01화 가장 적당하기에 최고일 수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