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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wayslilac Nov 16. 2020

가을

매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있다가 맨발로 집을 나설 때 발가락 사이로 싸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그제야 올 한 해도 거의 끝나감을 알아차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거리를 걸어 다닐 때 손가락 끝이 간질간질 한 것, 입고 나갈 옷을 고르며 더울까 추울까 기로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것, 하늘이 맑아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게 되는 것, 한밤 중에 발이 시리고 콧속이 바짝 말라서 깨는 것, 반팔과 패딩이 공존하는 지하철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 수박을 밀어내고 감과 귤이 들어오는 것,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 질문엔 항상 가을이라고 답했다. 트렌치코트와 가죽 재킷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세상에 나와 잘 어울리는 색이 가득해서 좋다. 쌀쌀한 공기와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단풍에 저며든 풍경은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유난히 더웠던 것처럼 느껴졌던 축축한 여름을 지나고 나서 맞는 가을은 잘 견뎌냄에 대한 꿀 같은 보상이다.


올해는 가을을 늦게 발견했다. 코로나와 재택근무의 합동으로 감각이 둔해진 탓이다. 사무실로 출근을 하면 아침 공기와 수목이 하루하루 변하는 걸 확인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명분을 만들어야 그 재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올 가을은 유난히 아름답다. 세계를 관통한 국가재난이 몰고 온 불안과 무기력이 걷힐 줄을 모르지만 이대로 잠겨있다 끝나면 억울할 것 같다. 매일같이 들려오는 우울하고 비통한 소식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Nothing but ‘단풍구경’이다. 억지로라도 나 자신을 행복한 기억이 있던 곳으로 끌고 나가 내일의 희망을, 삶의 충만함을 느끼게 해 줘야겠다. 내 올 가을 계획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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