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하게 집 밖을 나섰다는 건 마스크를 잊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대중교통에서 사레들려 기침을 한다면 주변에 진돗개 발령급 경계대상이 된다는 것, 옛 영화나 드라마에서 군중이 나오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마스크 안 써도 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해본, 그렇지만 이젠 자리 잡은 일상적 생각이 되었다. 나는 新 일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목격자이자 당사자로 2020년 11개월 중 약 3개월 정도만 회사로 출근하고 약 8개월 동안 재택근무를 했다.
집 한켠에 마련된 이케아의 하얀 책상과 그 위에 아이맥, 무선 키보드와 무선 마우스, 노란 리걸 패드와 검정 볼펜 한 자루, 갓 내린 따뜻한 캡슐 아메리카노, 그 뒤로 맑은 하늘이 보이는 큰 창과 바람에 살랑거리는 레이스 커튼. 출퇴근길에 환멸을 느끼던 나에겐 상상만으로 여유로워지는 재택근무의 이상향이었다. 재택근무를 하라는 공문이 왔을 때의 설렘은 반차를 앞둔 금요일 12시쯤 셀렘의 약 10배쯤은 됐다. 집으로 가져갈 사무 용품을 챙기며 잊은 물건이 있어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했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열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에 앉아있을 때의 홀가분함과 한가로움이 여적 기억이 난다.
기간으로 따지면 두 번의 재택근무를 했는데 – 대구에서 시작된 올 초, 수도권에서 확산된 여름- 개인적인 소비 패턴은 이전과는 달랐고 두 기간 동안도 다른 양상을 보였다. 1차 재택 땐 사무실로 출근하던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커피도 배달시키고 최소 주문금액을 맞추기 위해 디저트로 필수로 주문했다. 점심도 배달 강국의 명성을 굳건히 유지해 주기 위해 일조했다. 출근했을 때 즐겨먹던 마라탕, 샌드위치, 짜장면, 돈가스 등 누구 하나 서운하지 않게 돌아가며 시켜 먹었다. 교통비는 평소의 1/3 수준이었지만, 식비가 그만큼(그보다 더) 들었다. 다만 회식, 저녁 약속, 술 약속에 따라오는 택시비 지출은 줄었다. 2차 재택기에는 1차 때 찐 살을 빼보겠다고 마켓 컬리를 자주 이용했다. 각종 다이어트 도시락, 닭 가슴살을 장바구니에 담다 보면 5만 원은 기본이지만, 1주일 정도 먹으면 저렴한 거라고 생각하며 주문했다. (실제로는 점심에 도시락 먹고 저녁에 치킨 시켜 먹었다.) 커피도 셀프 드립 커피로 취향을 바꿨다. 평일에 아낀 돈은 (실제로는 아끼지 않았다.) 주말에 써도 된다는 생각으로 약속 때 쓰는 액수가 커졌다. 조삼모사에 가까운 지출 패턴이지만 공통적으로 색조 화장품에 쓴 돈은 0원이었다. 기초 제품도 끝까지 다 쓴 후에 용량 크고 써봤던 걸로 대충 샀다. 옷도 거의 안 샀다.
Zoom과 같은 클라우드 플랫폼의 사용이 늘면서 업무 방식도 변했다. 잦은 업무전화는 최소한으로, 온라인 미팅 플랫폼을 사용하여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전화보다 이메일이 편한 내 시대의 사람들은 이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50대 T 차장님은 여전히 화상 회의와 각종 툴 사용법을 익히려 부하직원을 괴롭힌다. 영업 C팀은 매주 전화로 혹은 대면으로 하던 미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면서 화상을 켜야 하는 룰이 생겼다. 얼굴을 봐야 잊지 않고 팀워크를 견고히 할 수 있다나 뭐라나. 업체를 방문할 일이 없음에도 눈 뜨자마자 주섬주섬 상의만 정장으로 갈아입는 모습은 미팅이 끝나고 난 후 약간의 현타를 불러온다고 한다. 영업 D팀은 9시에 출근 보고를 한다. 업무전화가 줄어든 대신에 업무 메신저가 늘어난 탓에 M 씨는 메신저 오는 소리에 예민해져 그 집 식구들이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고 한다. 메신저의 초록불은 실제와 상관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지를 판가름하기 때문에 메신저를 핸드폰에 설치하기도 한다. 주어진 자유를 통제하려는 임원진들과 편법들로 이에 맞대응하는 영리한 직장인들의 팽팽한 싸움은 흥미로울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 막히는 고요를 깨기 위해 점심은 드셨냐는 둥 바쁘시냐는 둥 겉치레를 안 해도 되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마주치면 인사하기 껄끄러운 사람들을 안 봐서 좋았다. 살쪘느니, 표정 좋은 거 보니 한가한가 봐? 라느니 오지라퍼들의 이 사이에 낀 시금치 같은 찝찝한 말을 안 들어도 됐다. 회사 밖에서도 볼 사람은 본다. 외출이 소중해지는 만큼 소중한 사람들한테만 내 시간을 쏟았다. 코로나는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의 완벽한 방패막이다. 내 건강을 위해서 못 만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 간의 소통이 줄어들어서 걱정하는 의견들이 있다는데, 오히려 더 밀도 있어졌다고 느꼈다.
1차 재택기에는 업무를 침대에서, 식탁에서, 소파 테이블에서 했다. 누워서 하다가 집중할 일 생기면 카페로 피신하고 업무와 일상의 분리가 없었다. 편하게 일하려던 나태함이 지속되자 일상의 붕괴와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매일 밤 오늘 뭐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2차 재택기엔 안 쓰던 작은방을 사무공간으로 만들어 분리시켰고, 전화영어를 이른 시간으로 바꿔 책상에 강제로 붙어있게 했다. 분리시키고 정해놓으니 확실히 편안해졌다. 유튜브에서 일상 루틴 콘텐츠가 트렌드가 되는 것은 모두가 일련의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친한 언니 S는 원활한 업무를 위해 모니터를 새로 구입하여 홈 오피스를 만드는 대담함을 보였으며, H는 커피머신 구매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L 씨는 재택으로 늘어난 여유시간을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했다. '이 시국'에도 재택근무가 다른 세상 이야기인 수많은 직장인들이 있지만 겪어본 자로서 오만해져 보자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일상의 루틴을 만들어가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득만 취할 수도 있다는 걸 매일같이 체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