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윤회가 있다면, 다시 태어날래?

by 이제이

지구에는 참 다양한 종교가 있다.
크리스트교, 가톨릭, 불교, 도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
신을 믿는 방식도,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종교보다 ‘우주의 섭리’를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흐름, 영혼의 진화, 파동의 법칙.
3차원에서 4차원, 그리고 5차, 6차원으로 넘어가는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은 생명을 초월한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런 차원 이동이 가능하다면, 그것 역시 죽음을 넘어서는 일이 아닐까?
육체는 사라지되, 의식은 더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의미의 ‘윤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윤회를 ‘업보’라 한다.
전생의 행위가 현생에 영향을 미치고, 현생의 삶이 다시 다음 생을 결정짓는 순환의 고리.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과의 법칙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엔 윤회를 어쩐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은근한 기대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이번 생은 글렀어”, “다음 생엔 부자로 태어나야지” 같은 말들이 농담처럼 오가지만, 그 안에는 삶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다.

그 기대는 때로 ‘속죄’가 아닌 ‘욕망’에서 비롯된다.
삶의 고통을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루지 못한 욕망을 다음 생에라도 이루고 싶다는 마음. 그렇기에 윤회가 마치 영생의 다른 형태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문득 이런 말이 떠오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삶은 고되고, 반복적이고, 지치게 하면서도 죽음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이유. 그건 아마 이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작고 따뜻한 기쁨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계절, 문득 마주친 눈빛, 예기치 않게 들린 노래한 줄. 그 모든 것들이 삶을 ‘다시 살아도 좋다’고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다.

죽음 이후를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고민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묻고 싶다.

만약 몇 번이고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당신은 새 삶을 선택하겠는가?

니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삶은, 그대로 반복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내 삶은 과연, 되풀이되어도 좋을 만큼 충만한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후회 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가?

때론 초라했고, 때론 어수선했고, 때론 거짓말쟁이였고, 때론 비웃음거리였고, 때론 방탕했고, 때론 반짝였고, 때론 속았고, 때론 사랑했고, 때론 억울했고, 때론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때론 열정에 불타올랐고, 때론 냉소적이었고, 때론 한없이 다정했고, 때론 이기적이었고, 때론 왕따였고, 또… 무수한 나였던 삶.

그 모든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윤회가 있다면, 그 수많은 나들이 다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삶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어떻게 살아내느냐로 윤회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아직 윤회의 존재를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믿고 싶은 건 있다.
단 한 번의 삶이라도 아름답게(나답게) 살면, 그것이 곧 영혼의 진화일 수 있다는 것.
그게 내가 붙들고 싶은 인간다움이고,
지금 여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
아니면, 이 생이 마지막인 듯 최선의 풍요를 선사하고 싶은가?

나는, 오늘 조용히 선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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